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한성시대미사리유적발굴유물 (百濟漢城時代河南渼沙里發掘遺物)

鄕香 2006. 4. 10. 21:42

 

京畿道 河南市 渼沙洞 일대에 위치한 미사리유적은 1960년 金元龍 先生에 의해 新石器時代의 유적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래로 수차에 걸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79년에는 미사리 섬의 북쪽 일부가 사적2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후 1980년에는 사적지 일대에 대한 긴급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최근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유적 일대의 江流幅을 확장하여 江岸을 정비하고자 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는 1987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백제시대의 유구는 최상층에서 확인되었으며,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 및 타원형, 말각장방형, 방형, 출입구가 부가된 육각형 등으로 구분됩니다. 육각형에 출입구가 부가된 경우를 제외한 원형 및 타원형의 주거지는 지름 5m내외의 비교적 작은 규모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거지 내부 북동벽에 화덕시설이 설치되어 있는데, 화덕구조가 잘 남아있는 경우르 보면 돌과 점토를 섞어서 부뚜막형태의 구조를 만들고 가운데에는 네모나고 긴돌을 세워서 화덕에 올려놓은 토기를 바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말각장방형과 타원형 주거지는 한변이 5~6m가량 되며 한쪽 단면에 조그만 출입구가 설치된 예도 있습니다.

육각형의 주거지는 이들 주거지 보다 대형인 점이 특색인데, 서울대 B-2호 주거지의 경우 출입구를 포함한 전체의 길이가 10.9m에 달합니다. 주거지의 또 다른 시설로는 기둥구멍이 있는데 이전 시기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정연하게 잘 남아 있습니다.

기둥구멍이 가장 잘 남아 있는 B-2호 주거지의 경우육각형의 장변에 5-7개, 단변에 4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들 구멍 사이의 거리는 70~80cm 가량 됩니다.

 

 < 미사리 백제시대 유적 전경(1992년)>

 

< 미사리 백제시대 주거지 전경(1992년) >

 

주거지외에 저장공과 고상식가옥 등이 있는데, 저장공은 평면 원형과 방형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원형의 경우는 대체로 입구의 지름이 1~2m 가량되며, 수혈의 깊이가 깊은데, 단면 형태는 U자형으로 밋밋하게 내려 간 것과 바닥이 입구보다 넓은 주머니형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高床式建物은 이전 시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정면 1~2간, 측면 2~5간의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주로 주거지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이들의 규모로 보아 이들이 주거용이라기 보다는 저장용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 미사리 하층밭 노출 전경>

 

미사리유적에서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밭이 조사되었습니다. 밭은 남북으로 180m, 동서로 30m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밭이  상하로 층위를 달리하여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층밭은 하층의 밭이 폐기 된 후 그 위에 다시 수혈주거지가 한번 조성되었다가 폐기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늦게 사용된 유구입니다. 이 밭은 숭실대 발굴지역인 S23 E1 그리드의 남쪽 끝에서 시작되는데, 시작되는 곳에는 밭고랑과 같은 규모의 도랑을 동서 방향으로 한줄 돌리고 여기에서 바로 남북방향의 밭고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밭은 하층의 밭과는 달리 고랑과 이랑의 폭이 좁으며 그 단면은 톱니바퀴모양을 하고 있는데, 고랑과 이랑을 합한 폭이 약 100cm 정도이며, 고랑과 이랑의 폭은 일정한 편입니다. 층위에 나타난 이 밭의 고랑을 복원하여 보면 원래 고랑의 길이가 25~30m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이 밭의 범위는 동서로 60m, 남북으로 160m 가량으로 중간에서 끊어지거나 별도의 밭으로 구획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이 것을 坪으로 환산하면 약 3,000여평에 달하는 대규모의 밭입니다. 이 밭의 사용시기는 밭고랑 사이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미사리 하층밭 고랑내부 파종공(1992년) >

 

하층밭은 상층밭보다 20~30cm 가량 아래층에서 노출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전체 범위는 남북 110m, 동서50m가량 되며, 이를 평수로 환산할 경우 약 1700여평에 달합니다. 밭고랑과 이랑의 폭은 대체로 일정하고 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고랑과 이랑을 합한 폭이 150cm 가량 됩니다. 고랑의 깊이는 현재 15cm 가량이 남아 있으며, 폐기되는 과정에서 깎여나간 것을 고려한다면, 원래는 이보다 깊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고랑의 바닥 안쪽에는 약 30cm 간격으로 지름 20cm 가량의 구멍이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어 이곳에 곡식을 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상층밭의 북쪽에는 이 밭과 같은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기의 고상식건물과 육각형의 수혈주거지가 있어서 이 밭의 사용연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1호 주거지와 남북으로 길게 난 도랑이 이 밭이 폐기된 후에 설치된 것이어서 이 밭의 下限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들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가 대략 4~5세기경에 해당되므로 이 밭은 늦어도 4~5세기경 또는 그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미사리 하층밭과 층위 단면에 나타난 상층밭(1992년)>

 

 

 미사리 백제시대는 내용을 종합하면 대략 4期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1기는 A지구 (타)원형주거지가 축조되던 시기로 주거지 내부에는 비교적 정제된 형태의 화덕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거지 평면에서 별도의 출입구 시설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제2기는 B지구 하층시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특징적인 육각형구조의 주거지와 말각장방형주거지가 축조되고 있습니다. 주거지 내부에는 역시 정제된 형태의 화덕이 설치되어 있으며, 육각형 주거지의 경우 남쪽에 별도의 방형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주거지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도 조사된 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 거지 형태의 주거지는 시기차이가 아니라 기능의 차이로 생각되는데, 육각형에 출입구가 달린 형태의 고려대 KC-040호주거지의 내부에서 벼루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서 이러한 육각형주거지는 문자기록이 가능한 집단이 거주하던 특수한 용도의 거주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 이들 주거지 사이에는 고상식검물과 단면 U자형, 주머니형의 수혈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저장시설의 기능을 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또, 이 시기에는 주거지 사이의 넓은 공간에 밭이 설치되어 있는데, 확인된 면적만 해도 1,700여평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입니다. 이 시기의 유구배치를 보면 일정한 정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남북으로 약 180m에 달하는 지역에 밭이 설치되어 있고, 그 남쪽과 북쪽으로 주거지와 고상식건물, 저장공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서울대 B-2호거주지와 숭실대 B-가地域은 육각형주거지 1기와 말각장방형주거지 4기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내부에 고상식건물과 저장공이 배치되어 있어서 당시 마을 구조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第 3期는 B지구 중층시기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하층유구들이 홍수 등의 요인에 의해 동시에 폐기된 후에 조영된 것들로 2기의 주거지와 저장공, 1기의 고상식건물 등이 이 시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하층시기와 별 시기차이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第 4期는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로는 상층 밭이 있는데,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미사리 상층밭 고랑내부 퇴적토 제거작업 광경(1992년)>

 

 미사리에 백제시대의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있는데,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 합니다. 토기류는 高杯, 三足器, 蓋, 廣口長頸球形壺, 直口短頸球壺, 臺, 甕, 長卵形土器, 沈鉢形土器, 甑, 동이, 盌, 短頸廣口小壺, 盤, 뚝배기형토기, 甁類 등 한성백제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거의 모든 기종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器種별 구성비에 있어서는 몽촌토성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미사리의 경우 장란형토기류와 심발형토기류가 전체 토기의 76% 가량의 구성비를 차지하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이 중 장란형토기는 주로 화덕 근처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토기 저부에 점토가 불을 받아서 굳어 있거나 불에 그을린 적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직접 불을 받는 조리용기임이 틀림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사리의 경우 장란형토기의 구성비가 48% 가량 되는데 비해서 몽촌토성에서의 구성비는 5% 미만에 불과 한데, 이는 유적의 성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굽접시(高杯)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12호저장공/ 구경12.0 cm,높이5.6cm, 저경8.5cm /

 

 굽접시(高杯)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6호저장공/ 구경10.1cm,높이6.0cm, 저경7.3cm /

 

 굽접시(高杯)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12호저장공/ 구경11.9 cm,높이6.6cm, 저경8.9cm /

 

 세발토기(三足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1호주거지/ 구경11.5 cm,높이5.5cm,  /

 

 사발(鉢)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2호주거지/ 구경13.0 cm,높이4.2cm, 저경10.0cm /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1호주거지/ 구경14.6 cm,높이15.5cm, 저경12.7cm /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S20W1-8호/ 구경20.6 cm,높이20.9cm, 저경16.2cm /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A-2호주거지/ 구경19.7 cm,높이19.9cm, 저경15.3cm /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2호주거지/ 구경15.3 cm,높이15.3cm, 저경11.0cm /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13호저장공/ 구경15.2 cm,높이15.8cm, 저경10.6cm /

 

 계란모양토기(長卵形土器)

백제 한성시대 / 하남시 미사리 B-2호주거지/ 구경23.0 cm,높이38.6cm,  /

 

 짧은 목단지(短頸小壺)

백제 한성시대 / 서울 강동구 암사동-83/ 구경4.9 cm,높이9.7cm, 저경7.5cm /

 

 굽접시(高杯)

백제 한성시대 / 경기 광주/ 구경14.8 cm,높이7.7cm, 저경9.0cm /

 

 

  

 

 參考資料 : 서울大學校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