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생활문화

최욱경 (崔郁卿)작품

鄕香 2008. 2. 9. 00:40

   

1. 최욱경(1940-1985)의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1960년대 작품들은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데,

다이내믹한 형태, 강렬한 색채, 속도감 있는 붓놀림을 통한 격정적 화면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1960년대 후반에는 콜라주(collage)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캔버스는 형상과 구성의 장소로 변화하였고 색채 실험이 행해지면서 색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최욱경은 꽃과 같은 여성적인 소재에 관심을 돌려 꽃의 구조적 배열과 질서, 꽃잎의 형태, 강렬한 색상, 그리고

그것들의 미묘한 조화를 자신의 화폭에 담아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죠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의 꽃 그림들을 떠오르게 하는데,

오키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기를 꽃잎으로 치환하여 나타낸 느낌을 주어 에로틱한 느낌을 전달한다.

 

작품명    <열리기 전>

작가    최욱경

제작년도  1978

규격    99x74

재료   종이에 색연필

 

 

2. 이 작품은 최욱경(1940-1985)이 1980년대에 꽃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작한 연작 중 하나이다.

여성작가로서 여성적 소재를 다루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어 제작한 이 작품들은 죠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의 꽃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작품명 : 열리기 시작

작가   최욱경

제작년도 : 1978 

규격    99 x 74

재료   종이에 색연필

 

 

3. 이 작품은 최욱경(1940-1985)이 1980년대에 제작한 꽃 그림 연작 중 하나로, 꽃이 봉오리에서 시작하여 만개하는 과정까지의 절정을 표현한 것이다.
꽃의 구조적 배열과 질서, 꽃잎의 형태, 강렬한 색상을 70년대의 색면 회화와의 연관을 잃지 않으면서 제작하였다. 추상적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여성적 소재를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여성주의 미술의 한 경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꽃의 개화과정을 소재로 한 것은 미국의 작가 죠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역시 강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있다.

 

작품명    <만 개>

작가    최욱경

제작년도 1981 

규격    99x74

재료   종이에 색연필

 

이상하게도 예술가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것은  첫째 단거리형이고 둘째 중거리 형이고 셋째 장거리형이다.
단거리형이란 20대에 요절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죽는  사람이다.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 중거리형이란 대개 대대 후반 그러니까 38세를 전후로 해서 죽는 사람이다. 육상경기로 비교한다면 앞의 것이 100m 선수라면,  중거리형은 1,000m나 5,000m, 10,000m 선수이다. 비교적 많은 좋은 화가가  중거리형으로 생애를 마쳤다.
다음 장거리형이란 거의 90고령에 도달하는 장수의 예술가로서 30고개를 넘어서면 90고개에 직결되는 것이다. 많은  거장들이 90고령에  세상을 등졌다는 것은 미술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화가 최욱경은 분명 중거리형이다. 
그는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중거리의 생애로서  다른 사람이 90년에 할 일을 다하고 갔다. 물론 더 오래 살았다면  더욱 많은 작품을 남겼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늘은 그를 인생의 중도에서 거두었던 것이다. 
화가 최욱경은 타고난 예술가이다. 그는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고 그 소질을 후천적으로 연마시키는 노력가이다.
현실에 살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한국에 살면서 세계를 널리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누구보다도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그의 예술은 국경을 넘어서서 널리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화가 최욱경은 천생 예술가이다. 감성이 예민하여 보통인이 도달할 수 없는 깊은 곳까지 도달하였다. 그의 예민한  관찰과 폭있는 조형의 세계는 곧  그의 감성이 감지한 그만의 세계이다. 
화가 최욱경은 천생 고독한 예술가였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예술은 고독의 소산이라고 한다. 흔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진리이다. 사람은  고독하면 고독할수록 그의 시야가 넓다.  그렇게 확대된 시야로서 세계의 미를 보고 그렇게 본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실현하는 것이다.그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 최욱경을 일찍 잃었다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나 그가 남긴 작품이 왜 많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이 한 가닥 위안이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술은 흔히 고독의 소산이다. 그것은 예술  창조의 동기가 들뜬 심정보다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인생의 섬세한 구석까지를 통찰하고, 그렇게 관찰한 것을 표현하는 어떤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투명한 고독은 세계나 인생을 보고 느끼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데까지 이끄는 것이다.
화가 최욱경의 인간형은 내성적이고 주관적이며 사색적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회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불행한 것 같기도 한, 불확실한 그 무엇이다.
작가의 환경보다는 성격이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결정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을 초월한 운명적인 것은 결국 인간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피할 수 없고 받아들여 야만 한다.
그러나 성격은 자발적인 것이고 자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하고, 나름대로 처리해야 한다. 자기가 만든 그러한 운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은 사람들의 능력과 방법에 따라서 다르다.
최욱경은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오직 화가로서의  삶을 원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갔기 때문에 남다른 충돌과 갈등을 안게  되었다. 이 세상은 보통사람들에 의해 "상식적"으로 그 구조와 체제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남달리 창조자로서 예술에 전념하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많이  따르고, 자기 나름대로  해결하여야 할 일도  많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남은 많은 예술가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들은 크게 나누어서 비극적인 사람과 희극적인 사람으로 구분된다.첫째 부류의 예술가는 지나치게 예민한 감성으로 남이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자기만이 느끼기 때문에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하다. 온 인류의 고통을 자기 혼자 짊어진 것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간 많은 예술가들, 그러나 그들이 그 비극과 싸워  영원한 승리를 얻은 사실을 우리는 안다. 즉 비극이 구원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 다른 부류의 예술가들은 이른바 조화와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생을 지속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람이다.  일반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자기의 마음속에서  깊은 공감을   되새긴다.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인지 해야 하고 무엇인가 하다 보면 그것을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예술가는  그 중에서도 그러한 감각과 욕망이 유별나게 뛰어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자기의 독특한 방법으로 보통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아름다움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류의 목소리이고 인류의 행위인 것이다.
화가 최욱경은 유난히 깊은 감수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격적 특성이 그녀를 화가의 길로 이끈 것이다. 그녀는 아주 일찍부터 화가의 길을 걸었다.
 "예술가는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소질을 지녀야 한다는 뜻도 되지만, 남다른 고난을 초극하고 해결하는  강인한 정신력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젊어서  쓰러진 많은 예술가들이 이러 한 시련에 굴복해서, 이름도 업적도 없이 사라진 예는 얼마든지 있다. 최욱경은 일단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성공하였다. 

최욱경은 1956년, 서울예고 미술과에 입학함으로써 미술가로서의 장래를 기약했다.  그녀는 예고 재학시절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예고라는 학교가 예술가들의 조기발견을 위해서 특수한 교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욱경은 일찍부터 개성의 개발을 기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림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이 있다. 노란빛이 인상적인  「새장」의 그림은 당시로선 대단히 강렬한 감동을 지니고 있었다.
1959년, 예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였다. 미술대학 시절에 최욱경은 보통 학생과는 다른 박력과 개성으로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사물에의 집착력 이 남달라서 끈질기게 대상을 바라보고 또 표현하고 있었다.공부하는 태도는 진지했으며 끝까지 마무리 짓는 집념이 강해서 다른 학생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1963년, 서울미대를 졸업하고 곧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것은 그녀의 불타는 향학심과 예술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유학이었다. 그해 크렌부룩 미술학교(Cranbrook Academy of Art)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는 한편 조각과 도자기를 부전공하였다.
1965년, 크렌부룩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곧이어 뉴욕에 있는  부루클린 미술학교 (Brookly Museum School   of Art)와   스코히간 미술학교(Skowhegan   School of   Painting and Sculpture)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조각·벽화를 부전공하였다.
1968년부터 프랭클린 피어스(Franklyn Pierce)대학의 미술과 조교수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경직을 쌓았다. 
1971년, 귀국하여 9월에는 신세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활약하다가 1974년에 다시 도미하여 1976년까지 아틀란타(Atlanta)미술대학과 위스콘신(Wisconsin)주립대학 미술대 초빙 전임강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79년 3월, 한국에 돌아와서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로 1981년  2월까지 재직하고 그 이후 1985년 7월 16일 작고할 때까지 덕성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있었다. 
이상은 화가 최욱경의 학력과 교수직의 발자취를 간단하게 더듬어  본 것이다. 
이처림 화가 최욱경은 미국 또는 한국에서 교수직에 몸담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녀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예술의 창조에 있었다. 다만 그림만 그림으로써 살아갈 수 없고 인정받기 곤란한 우리 나라이기에 그녀도 교수겸 예술가라는 이원적인 방법을 택했을 따름이다.
많은 시간을 창작에 바치지 않고 교수직에 할애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을 위해서는 좋아도 예술을 위해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가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고독하고 내성적인 그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던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자기세계에 골몰해서 주변의 관심에서 초월한 채 살고 싶은 작가에게는 한국의  풍토가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와 같은 방황은 1979년 귀국 후에도 계속했다.  
비록 몸은 한국에 있어도 늘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이방인이 된 것은 물론 특수성격과 원인이 있지만 생의 기본이 되는 생활의 속도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이 풍토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질적인  생활의 속도와 방법이 어느  특정한 외국에서만 적합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자기 집중적인 그녀의 생활철학과  태도가 자기이외의 외부세계와 좀처럼 화해롭지 못한 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 의 작품세계는 그녀의 비범하고 고독한 성격의 소산이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회의적인 철학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일종의 페시미즘이 최욱경의 본질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염세주의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부정적으로 본다기보다는 단지 걷잡을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와 갈등 때문인 것이다.  
때로는 깊은 바다에 빠지는 듯한 고독에 사로잡히는가하면 폭발하는 화산과 같은 분노 등이 그녀에게 작품을 창조케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1979년 11월, 미국문화원에서 개최한 초대 개인전 "뉴 멕시코의 인상"에 즈음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공간지에 쓴 바 있다.

미국 화단에 정착하고 주기적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최욱경전은 화가  최욱경의 중간보고인 동시에 그녀의 성장과 변모의 기록이기도 하다. 본 전시는 "뉴 멕시코의 인상"이 라는 표제를 내걸고 단일 주제와 동시성을 나타내고 있다.
화가 최욱경은 비록 화단을 떠나서 이어 미국 땅에서 작가로서 잔뼈가 굵고 그리고 미국사회 속에서 화가로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그의 관심과  시각은 늘 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작품들은 로스웰(Roswell) 미술관과 미연방정부 예술진흥연구비로 10개월간 제작한 것인데 그것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인 동시에 여류화가로서도 처음 받는 명예로운 연구비라고 한다. 여하간 이러 한 조건 속에서 제작한 것이 이번 전시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최욱경이 추구해 온 예술방향이  더욱더 새로운 진전을 보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는데, 굳이 유파적인 분류를 한다면 추상표현주의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주관적으로 인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있는 리얼리티를 잡아서 그것을 미적 체계까지 승화시키는 추상표현주의는 이른바 추상주의와 표현주의가 합쳐진 것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세계미술의 전위적인 양식이 되어 왔다. 
추상표현주의는 추상주의의 방법에 따라 대상과 자연의  본질적인 현황을 탐구한다. 그렇게 하여 탐구된 자연의 원형을 화가의 주관과 개성에 따라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화가의 주관임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타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종래의 표현과 같이 개성이나 독창성 이 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뉘앙스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20세기 이전의 천재들의 개성이나 독창성은 다분히 개인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현재의 주관적  표현들은 개인적인  성격보다는 사회적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욱경 작품에서는 강렬한 조형의 힘이 온몸을 사로잡는다.그것은 고요한 설득이 아니라 강렬한 주장으로 보는 이의 눈을 통하여 마음의 중심부에 도달한다.
순간 무엇인지 쇼킹한 충동이 마음의 내부세계에서 작동한다.이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분석하여 본다면 폭풍처럼 형성된 형태와 속도감 있는 붓놀림, 그리고 날카로운 색채의 대비효과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뉴  멕시코의 거대한 공간과 엄숙한 자연을 표현하기에는 그와 같은 감동적인 표현 방법만이 적당한지도 모른다. 
새와 같은 날짐승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푸른색을 배경으로 화면의 왼쪽 위에서 아래로 치달아 내려오고 있다. 아마 뉴  멕시코의 광막한 공간의 인상이 정착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작품에는 움직이는 온갖 짐승들의 형상이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형태들은 생명감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유동의 상태로서 파악된 듯, 한결같이 움직이고 있다. 다만 그 움직임은 현실적인 움직임과는 다르다.그것은 동작의 연속과 행동의 단면으로써 진실한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유동의 공간을 작가는 활달한 붓의 움직임과 몸의 공간으로써  성취하고 있는데, 특히 그녀 의 작품은 손끝의 작업이 아니라 손을 포함한 온몸의 동작에  근원을 둔다. 동시에 그 몸의 동작은 그녀의 정신의 지배에 머무르고 있다. 
그녀가 즐겨 쓰는 붓의 움직임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오는 대각선이다. 이와 같은 대각선은 그의 의식적인 균형감각에 의해서 화면의 안정을 이룩한다. 
대체로 색채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관련이 깊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그림에선 형태를 덮는 하나의 의상으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욱경의 경우, 색채는 그 자체로써 형태가 된다.형태가 있고 그것을 위하여 색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칠해진 면이 곧 형태인 것이다. 
이러 한 감동적인 조형공간은 결국 화가의 인생관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보고 난 후 필자가 느끼게 되는 특이한 사실중의 하나는 어딘지 한국의 민속적인 색감과 형태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린 사람이 한국인이기 때문인지, 혹은 필자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점에 대해서 최욱경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창작  영감을 얻는다. 나의 작품들은 내 과거와 현재의 경험들을 한자리에 꼴라쥬(collage)한 것이다.  
화면상에서 형태가 이루어질수록 작품들은 제각각 생명을 갖게 되고 나는 단지 나의 느낌들을 시각적인 언어로 전할뿐이다.작품들은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지만 단순히 그 상황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체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한다.그렇기 때문에 내 작품에 대한  이해는 곧 내 경험에 대한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화가 최욱경의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이야기하려면  학창시대의 모색의 단계에서 한  사람의 화가로 성숙한 미국 시절과 1979년 귀국해서 1985년 작고할 때까지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들을 분류해서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 화가의 짧은 예술적인 생애로 본다면 말년이 가장 무르익는 창조적인 연대이기 때문에 굳이 분류해서 따로 살펴볼 필요는 없다.  
1984년 5월, 워커힐 미술관 개관기념 전에 출품했던 규모가 크고 감동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작품에서는 그녀의 심성이 폭발해서 커다란 격정에 이르고, 그  격정이 화면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한 감동적인 화면은 70년대나 80년대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화가 최욱경이 초극하려는 인생과 극복하려는  미의 세계에 대 한 끊임없는 탐구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화면 위에 3차원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한 공간개념 속에서 비합리적인  인간의 상황과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과의 싸움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싸움이 승리하리 라고 믿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절망을 딛고 서서 그녀는 싸웠다. 현대의 인간이 상실한 것을 회복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곧 온몸으로 부딪쳐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그녀의 미술작품에서는 색채와 형태와 스케일로써 직감적(시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녀가 쓴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과 여기저기 발표한 산문들은 최욱경의 예술관을  직감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화가 최욱경과 인간 최욱경의 갈등에서 빚어낸 비극적인 생애는 마침내 이 천재적인 여류화가의 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85년 7월 16일, 불과 나이 45세로 이 세상을 등지고만 것이다. 
결국 화가 최욱경 예술의 본질은 페시미즘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긍정하는 태도보다는 부정하는 태도로 바라보았고 희극보다는 비극적으로 해석했다. 그러한 화가 최욱경의 비극정신이 45년간을 지속하여서 자기 예술을 창조하는 근원적 인 힘 이 되었다.  
아울러 그의 예술의 근원은 자연이었다. 그것은 생의 영위 속에서 비극으로 쫓기는 한사람의 인간 또는 한사람의 예술가가 오직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세상에 우글거리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조물주가 창조한 자연만이 그의 벗이 되었던 것이다.   
자연에서 출발하긴 하지만 작가는 그 자연의 질서를 자기의 마음 안에서 일단 파괴하고, 그 후 자신의 정신과 감각으로 다시 구성한다. 그것은 강렬한 색채와 속도감 있는 붓 놀림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이 경우 그녀의 작품은 그가 사랑하던 자연과 같이 파격적으로 커다란 규모를 지니고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의 작품에서 늘  부족을 느껴 오던 스케일이 그녀의 작품에는 있는 것이다.  
닫혀진 개성이 창조한 열려진 조형공간, 그것이 바로 화가 최욱경의 예술세계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이 경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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