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代 首露王 (?~199 )》(재위 49~199)
일명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族長) 이하 수백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빛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의 알이 여섯개 있었다.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이때가 42년(후한 건무 18)이었다고 한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國)의 왕녀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 거등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이어서 그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신화는 그 구조상으로 볼 때, 신성한 왕권의 내력을 풀이한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한국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황금빛 천강 등으로 상징되는 북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유이민집단이 낙동강 하구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하여 초기국가를 형성해나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아울러, 수로가 여섯개의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는 표현은 가락국(금관가야)을 중심으로 가야제국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이 신화에서 3월에 목욕재계하고 잡스러움을 떨쳐버리는 불계의식(佛界儀式)을 거행한 뒤, 구지봉과 같은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의식을 베풀어 한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으며,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 집단의 수장(首長)을 선출하였고 이때 뽑힌 수장은 그 권위를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던, 국가체 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운영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지역에 존재했음직한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에도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봉사(奉祀)되었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위전(位田)을 설치하여 능묘의 제례를 후손에게 계속하게 하였으며, 그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최치원의 〈석이정전 釋利貞傳〉에서는 금관가야의 시조를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여 서로 비교가 된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 增東國輿地勝覽, 李丙燾, 首露王考, 歷史學報 17·18합집, 1962;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1976.
《2 代 居登王?~253》 ( 재위199~253)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허왕후(許王后)의 아들이다. 비는 천부경(泉部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 마품(麻品 을 낳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3代 麻品王?~291》 (재위 253~291)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253년에 즉위, 39년을 다스리고 291년 1월 29일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4代거칠미왕(居叱彌王)?~346》 (재위291~346)
아버지는 제3대 마품왕(麻品王)이며, 어머니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다. 비는 아간(阿干)의 벼슬을 지낸 아궁(阿躬)의 손녀인 아지(阿志)이며, 이품왕(伊品王)을 낳았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
《5代이시품왕(伊尸品王)?~407》 (재위 346~407)
이품왕(伊品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거질미왕(居叱彌王)이며, 어머니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이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좌지왕(坐知王)을 낳았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0년에 왜가 신라를 침범함에 고구려가 구원군을 보내어 왜적을 물리치고 임나가라(任那加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이시품왕대의 사실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廣開土王陵碑 .
《6代좌지왕(坐知王)?~421》(재위 407~421)
김질(金叱) 또는 김토(金吐)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5대 이시품왕(伊尸品王)이며, 어머니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고, 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취희왕(吹希王)의 아버지이다.
즉위한 뒤 용녀(傭女)와 혼인을 하고 그녀의 척당을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하여졌다. 이 틈을 타서 신라가 가야를 치려고 모의하였다. 이때 박원도(朴元道)의 충고로 용녀를 귀양보내고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7代 취희왕(吹希王)?~451》 (재위 421~451)
질가(叱嘉)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좌지왕(坐知王)이며, 어머니는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비는 각간(角干)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이다. 질지왕(질知王)의 아버지이며, 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8대질지왕(金+至知王)?~492》 (재위451~492)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7대 취희왕(吹希王)이며, 어머니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다. 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다.즉위한 이듬해에 시조인 수로왕과 왕후 허황옥(許黃玉)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짓고 전(田) 10결을 주어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고 한다. 《남제서 南齊書》 동남이전(東南夷傳)에 “가라국(加羅國)은 삼한종(三韓種)이다. 건원(建元) 원년(479)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냈다. 이에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하였다.”고 하였는 바, 하지왕이 혹 '질지왕'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三國遺事, 南齊書.
《9代 겸지왕(鉗知王)?~521》 (재위 492~521)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김(金)은 성이고, 겸지(鉗知)가 이름이나, 지(知)는 가야와 신라인의 이름에 붙는 어미로서 실제의 이름은 ‘겸’이다. 아버지는 질지왕(질知王)으로 김질왕(金질王)으로도 불리었으며, 어머니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다. 왕비는 각간 출충(出忠)의 딸로 숙(淑)이며, 아들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492년에 즉위하여 30년간 재위하였다.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 駕洛國記〉의 사료적 신빙성을 부정하고, 제7대 취희왕(吹希王), 제8대 질지왕, 제9대 겸지왕을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가실왕(嘉實王, 또는 嘉悉王)과 모두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대가야 등과 같은 금관가야 이외의 가야국을 인정하지 않은 견해로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 弘文館, 1949洪淳昶, 金官國의 世系에 대하여, 三國遺事硏究 上,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3, 今西龍, 加羅疆域考, 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1965 .
《10代 구형왕(仇衡王)?~ ?》 (재위521~532)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 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 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三國遺事, 日本書紀.
구형왕릉(仇衡王陵) 모습이다. 능은 언덕을 따라 잡석으로 7개의 壇 형태로 쌓았고 그 위에 물방울원형의 봉을 두었으며 5단 정면에 감실(龕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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