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조선 중종(中宗)대 명신으로 필명이 높아 안평대군 .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한호(韓濩 1543-1605)와 함께 조선 전반기 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컫습니다. 서예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와 개성의 시기인 16세기 전반기에활동한 그의 글씨는성격처럼 활발함과 독특한 개성을 보여 줍니다. 김구의 초서는 빠르고 물기 없는 필획으로 곧게 휘두르는 필치가 특징인데, 이같이 개성 독특한 그의 서풍을 仁壽體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기의 큰 글씨 초서는 장필(張弼)과 이동양(李東陽) 등 明代 서가들의 거칠고 감각적인 필치의 초서풍으로부터영향을 받은 바 크며 김구의 이 글씨에서도 이와 같은 시대적인 분위기와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구의 이 초서는 변화와 조형성이 있는 動感이 큰 글씨로 특히 중간 무렵부터는 자암 특유의독특한 필치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필획의 변화와 힌, 글자의 배치와 여백을 통해 긴장감을 아울러 느끼게 해줍니다. <解設 朴聖援>
김구(金絿 1488-1534)의 본관은 광산.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삼일재(三一齋). 아버지는 현감 계문(季文)이다. 1503년(연산군 9) 한성시에서 1등으로 뽑혔고,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다. 15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전경(典經)·사경(司經)·부수찬 등을 지냈다. 1515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홍문관직제학·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남곤(南袞)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함께 투옥되어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졌다. 1533년 풀려나 고향인 예산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죽었다. 일찍부터 주자학연구에 전념하여 학문이 조광조·김식과 견주었으며, 음률에도 뛰어나 악정에 임명된 적도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손꼽힐 만큼 글씨에도 뛰어났다.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다 하여 독특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저서로는 〈자암집〉이 있고, 글씨로는 〈자암필첩〉·〈우주영허첩 宇宙盈虛帖〉 등이 전한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예산 덕잠서원(德岑書院)과 임피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六一帖』(全16冊)中 第一冊) 김구(金絿)가 쓴 두보(杜甫)「絶句二首」中 一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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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일강산려춘풍화초향<遲日江山麗春風花草香> 기나긴 봄 햇살에 강과 산이 빛나고 봄바람에 꽃과 풀이 향기롭다. ↑
↓ 니융비연자사난수원앙<泥融飛燕子沙暖元央> 흙이 녹으니 제비가 날아오고 모래사장이 따뜻하니 원앙새가 조는구나. ↓
자암 김구 필 초서 오행시 (自庵金絿筆草書/杜甫'絶句二首中一首)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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