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풍속화(風俗畵)

단원 김홍도 필 십노도상첩 . 장조평 (十老圖上帖 . 張肇平)

鄕香 2011. 4. 29. 13:48

 

이 화첩의 내력은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암집(旅菴集)》<십로계축후서(十老契軸後序)>에 보이니 1781년 정월에 귀래정에서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舟 1429-?)가 은퇴하여 순창 남산(淳昌 南山)꼭대기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살다가 1499년 71세에 당대(唐代) 백낙천(白樂天)의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를 본따 이윤철(李允哲), 안정(安正), 김단(金단), 한승유(韓承愈), 설산옥(薛山玉), 설존의(薛存義), 오유경(吳唯敬), 조윤옥(趙潤屋), 장조평(張肇平) 등 동향의 아홉 노인과 모여 계회를 가졌다. 이를 기념하여 신말주가 직접 참석자의 그림을 그리고 칠언절구 한 수씩과 서문을 썼는데, 각 집에 한 본씩 나누었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능히 보전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여든 넘은 늙은 중이 신씨 8대손 후장을 찾아와 자신은 그림에 보이는 아무개의 하나 남은 자손이라며, 죽기 전에 원작자인 신말주의 후손에게 그림을 전했다고 한다. 이것을 1731년 후장의 손자인 중권(重權)이 임종하면서 다시 10대 손인 신경준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첩의 서문과 발문을 쓰고 머릿그림 송루한담도(松樓閑談圖)를 그린 강세황은 "열 노인의 도상은 찰방 벼슬을 했던 김홍도가 (옮겨 그린) 것이다. 간략히 붓을 놀렸지만 오히려 원래 면목을 잃지 않았다. 역시 화화계의 신필이라 하겠다. 경술년 가을 표암이 뒤에 쓰다." 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1790년 신경준의 아들이 강세황에게 부탁하여 김홍도가 원본을 따라 옮겨 그린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한편 이 작품의 원도(原圖) 또한 38.5×339.0cm의 두루마리로 전해지고 있는데 몹시 낡은 채색화로 형태는 두루마리입니다. 작품 일부에서는 다소 선묘에 힘이 없어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는 원화의 본래 면목을 잃지 않기 위한 이모 작업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좌변의 관서를 보면 "금릉 김홍도가 삼가 그렸다(金陵金弘道敬寫)"고 되어 있습니다.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白文朶圓印) '취화사(醉畵士)' 이며 작가의 인은 주문방인 '弘道'와 백문방인 '士能'입니다.

소나무 아래 석상에 항아리와 병이 즐비한데, 한 여인은 차를 달이는 모습이고, 한 여인은 떡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작품에서의 주인공인 장조평은 소나무 가지 아래 앉아서 흡족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촐한 선묘로 이끌어낸 장조평의 표정이 일품이며, 일필호 형태를 잡은 항아리와 병의 형태 또한 단정합니다. 소나무 둥지 껍질 묘사에는 김홍도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십노도상첩 . 장조평 (十老圖上帖 . 張肇平)

朝鮮時代 / 金弘道(1790年 46歲作品) /紙本水墨33.5×28.7cm /湖巖美術館 所藏

 

(張肇平)                                                                  (李允哲)

 

십노도상첩 (十老圖上帖)

朝鮮時代 / 金弘道(1790年 46歲作品) /各 紙本水墨33.5×28.7cm /湖巖美術館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