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김홍도 필 을묘년 가을화첩 제3경 해암호취(金弘道筆乙卯年畵帖海巖豪鷲)

鄕香 2011. 4. 2. 14:36

좌변의 주문방인(朱文方印)이 '弘道'이나 작가 자신이 찍은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드넓은 바다에 불쑥 솟아오른 기괴한 암봉, 암석을 때리는 파도와 물보라, 그리고 그 정상에 일촉즉발의 자세로 아래쪽을 응시하는 기세도 당당한 세찬 모습의 독수리가 그림의 전부입니다. 이 모든 소재는 호쾌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데, 구도 역시 화면의 정중앙 세로축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면에 일부 보이는 또 다른 암봉의 끄트머리로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보강되고 있습니다. 작품의 가장 커다란 볼거리는 역시 괴석의 線描입니다. 해풍에 씻겨 뚫리고 깎인 험상궂은 바위의 윤곽선은 굵기가 다양함은 물론이고곳곳에서 뻗대는 듯 뒤틀림으로써 바다바위의 강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정상에 세찬 모습으로 앉은 독수리의 용맹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이며, 그러면서도 작가는 하면에 선염을 덧대어 안정감을 확보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파도를 요령 있게 생략함으로써 바다의 드넓은 공간을 오히려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천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화첩은 낱장으로 불리되었는데, 현재 그 가운데 3점만이 확인되었으며, 이 그림은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중 '총석정'에 "을묘중추사 증 김경림. 단원(乙卯仲秋寫 贈金景林.檀園)"이라는 관서가 있어서 1795년8월 김경림에게 그려준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림(景林)은 김한태(金漢泰)의 字입니다. 김한태(1762~?)는 본관이 우봉(牛峰), 號는 영원(寧遠)으로 역관(譯官) 절충장군 첨추 이서(折衝將軍 兼樞履瑞)의 아들로 본인도 역관이었습니다. 1786년 식년시(式年試)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역과방목(譯科榜目)에 자헌대부(資憲大夫)까지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관직은 한학교회(漢學敎誨), 지추(知樞)를 지냅습니다. 소금장사를 했다는 전문(傳聞)이 있으며 당시 한양의 첫째가는 거부(巨富)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엉청난 富와 화려한 생활상, 그리고 나아가서 정경유착적(政經癒着的)인 면면들은 이조원(李肇源1758~1832)의 옥호집(玉壺集)에 보이는 대고(大賈)라는 서사시에 비판적으로 읊어져 있습니다. 시인묵객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김홍도를 후대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 내용은 오세창(吳世昌)선생이 전한 것인데 그 처숙부(妻叔父)가 김한태의 후손이었다고 하므로 신빙성이 높습니다.

 

 

김홍도 필 을묘년 가을화첩 제3경 해암호취(金弘道筆乙卯年畵帖海巖豪鷲)

朝鮮時代 / 金弘道(乙卯年51歲그림) 紙本淡彩 23.2 × 27.7cm / 個人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