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오원 장승업 필 영모도10폭병(吾園張承業筆翎毛圖十幅屛) 1.

鄕香 2011. 3. 17. 18:41

장승업(張承業1843 ~ 1897)의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취명거사(醉瞑居士)·문수산인(文峀山人)입니다.

선세(先世)가 무반(武班)이었으나 어려서 머슴살이를 했다고 하며, 서울에 정착한 후 수표교에 살던 이응헌(李應憲) 또는 역관 출신의

변원규(卞元奎)로 알려진 사람의 집에 기식하게 되면서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원(元)·명(明) 이래의 명적들을 접하고 스스로 익혀

어느날 문득 화리(畵理)를 터득하고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화명은 날로 높아져 왕실에서는 그를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여 그림병풍을 제작하게 했으며,

 이때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했고, 특히 어떤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궁궐에서 3번씩이나 도망친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활동을 벌인 천재 화가인데다가 奇行이 많은 사람으로도 유명하여 그가 최근세의 사람이면서도 마치 傳說 속의 작가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張志淵의 《吾園張承業傳》에 따르면 성격이 괴팍하고 또 女色을 좋아하여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美人이 곁에서 술을 따르게 해야 得意作이 나왔다고 합니다. 또 나이 40세에 억지로 장가를 들였으나 하룻밤을 지내고서 新婦를 쫓아버린 그 후로는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고 하며, 酒癖과 奇行 뒤에 天稟을 숨기고 자신은 완전히 局外者로서 世輪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예술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으의 藝術眼에는 王도 부호도 없고 권력의 억압에도 淸操를 지켰습니다. 오원은 소위 仿元人法이라고 하여 맹수를 자주 그렸거니와, 또 한가지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한 것은 그의 《蘆雁圖》와 《器皿折枝》였습니다. 그의 노안(蘆雁)은 머리가 유난히 크고 날개가 작아서 하늘에서 땅 위로 내려오는 광경은 마치 무거운 머리를 들이 박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오원 장승업 필 영모도10폭병(吾園張承業筆翎毛圖十幅屛)

朝鮮時代 / 張承業(1843~1897)/紙本淡彩31×113cm / 個人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