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순천 조계산 송광사 · 불일암 (順天曹溪山松廣寺不日庵)

鄕香 2010. 12. 1. 00:52

 

송광사로 가는 길가 주암호에 뽀얗게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마치 수면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錯視에 넋을 놓습니다. 이처럼 신비로운 세상의 고운 것들에,  나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한 모습이고자 마음을 모락모락 피워 대화를 나눕니다.. 저 물이 찬 대기에 뿜어내는 물안개처럼... 

 

 

사적 및 명승 제 8호 조계산은 湖南正脈의 명산입니다. 曹溪叢林松廣寺와 太古叢林仙巖寺를 양 기슭에 안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송광사 뒤 영봉을 松廣山, 선암사 뒤 장군봉(884m)을 淸凉山이라 불렀습니다. 조계산은 대부분이 낙엽활엽수로 덮여 있어 계절마다 자연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비룡폭포와 초암폭포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더 합니다.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三寶寺刹의 하나인 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참선을 중요시하는 禪宗寺刹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 깊은 古刹입니다. 신라 말 古僧 慧璘先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 이름은 松廣山 吉祥寺였고 100여 칸쯤되는 寺刹로 30-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 후 고려 인종때 釋照大師께서 重建하려다 입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50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고려 중기 古僧 不日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부터입니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 (명종27년, 1197년 희종 원년)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에 동참하는 수많은 大衆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습니다. 혜린선사가 창건한 이 후 보조국사를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입니다.

그 동안 정유재란 및 임壬寅年(현종 8년:1842년)의 大火災,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 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 하사당(보물263호), 소조사천왕상(보물1467호) 등을 비롯해 총 8천여 점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송광사 조계문(松廣寺曹溪門)>

조계문은 송광사의 첫 관문으로 一柱門이라고도 합니다.

이 일주문은 신라 말에 처음 세운 것을 1310년, 1464년, 1676년, 1802년에 고쳐지었으며 현재의 조계문은 양식상 1802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계단 좌우에 세운 돌짐승은 그 형태가 모호하여 사자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합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일주문 안쪽 위에 들보에는 "僧寶宗刹曹溪叢林"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승보종찰'이란, 불교에서는 귀하고 값진 세 가지 보배 즉, 佛.法.僧을 三寶라 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에는 이 삼보를 상징하는 삼보사찰이 있으니 (양산 통도사).(합천 해인사).(순천 송광사)입니다.

「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어 "佛寶寺刹" 」, 『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모시고 있어 "法寶寺刹"』, 송광사는 한국 불교의 僧脈을 잇고 있어 "僧寶寺刹"이라고 합니다. 승맥을 잇는다는 것은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근본도량으로서, 또 보조국사를 포함한 16국사를 배출한 수도도량으로서 이를 이어 현대의 '효봉' , 취봉, 구산, 일각선사 등 많은 스님들의 수행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각(洗月閣)/척주당(滌珠堂)>

일주문을 들어서니 일직선상 앞에 기와를 올린 낮은 돌담을 돌린 그 안에 맞배지붕의 한 칸 남짓한 작은 건물 두 채가 字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크기와는 달리 중압감을 풍깁니다. 한 채는 '洗月閣' 이란 현판이 걸렸고, 다른 한 채는 "滌珠堂"이란 현판이 걸렸습니다.    

여기는 장례를 치른 고인의 위패를 법당에 모시기 전에 잠시 이곳에 위패를 모셔놓고 망자의 영혼에 묻어 있을 세속의 때를 씻어내는 곳입니다. 세월각(洗月閣)은 여자의 위패를  척주당(滌珠堂)에는 남자의 위패를 모시는 곳입니다. 남녀가 유별하고 부정한 영혼을 치유하는 옛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입니다. 


 

이 樓는 四天王門을 거쳐 대웅전으로 가는 初入으로, 溪川 위에 놓은 아치형의 무지개다리(虹霓橋) 위에 세운 일종의 樓이자 통로입니다. 이 樓에 이어 바로 四天王門인데 공사안내문판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현판에 "松廣寺"가 써 있습니다.

 

 

측면으로 본 전경으로 아치형의 무지개다리(虹霓橋)가 보입니다.

 

 

홍예교 밑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가에 축대를 쌓은 위에 건축한 회랑건물 옆에 붙여 돌출시켜 긴 다리를 맑은 물에 담근 듯이 돌기둥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지은 亭子인데, '亭'字만 보입니다.

 

 

침계루<杭溪樓> 시내를 바라보는 누각이란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여기의 枕은 '배개 침'이 아닌 "임할 침"을 뜻합니다. 

 

 

 <송광사 사천왕(四天王)>

송광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조성한 것으로 송광사 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두 4구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의 배열은 천왕문의 向 우측으로 비파를든 북방다문천왕과 검을 든 동방지국천왕이, 向 좌측으로는 당을 든 서방광목천왕과 龍,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왕이 각각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 순으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네상 모두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전형적인 분노형 얼굴에 머리에는 용, 봉화, 운문이 장식된 冠을 쓰고 갑옷을 입은 武人像이며 각기 오른발은 악귀를 밟고 있는데 비해 왼발은 악귀들이 받쳐든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얼굴 표정이 분노형으로 강한 인상이기는 하나 볼륜감이 뛰어나 다소 해학적인 면도 나타나 보입니다. 대형의 像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각 부의 비례가 어긋나지 않고 적당하며 부피감과 함께 사실적기법이 돋보입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16세기 초)과완주 송광사 사천왕상(1649년)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이 松廣寺 四天王像은 조선시대 1628년(인조6년)에 다시 만들었다는 송광사 서고, 寺誌 등의 자료가 남아있어, 정유재란으로 훼손된 像을 1628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사천왕像에 단청공사 중입니다.

 

 

정교한 石築 위에 黃泥와 瓦塼으로 예스럽고 정갈한 멋진 담과 굴뚝을 만들고 맞배지붕 위에 앙증스런 맞배지붕모양의 換氣口를 올린 모습의 주변 건축물들의 조형미가 참으로 멋스러워 담았습니다.

 

 

"한붕화상 漢朋和尙" 이란 문구가 새겨 있는 샘입니다. 화상이란 수행을 많이한 스님의 높임말이니 한붕이란 法名의 高僧이 만든 泉이 아닐까요.

 

 

송광사 성보박물관 건물입니다.

 

 

<송광사 대웅보전 松廣寺 大雄寶殿>

지금의 대웅보전은 1951년 소실 후 1988년 송광사 8차 중창 당시 다시 지었습니다. 대웅보전에는 삼세(과거,현재,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며, 각 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송광사 승보전(松廣寺 僧寶殿)>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중창 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송광사 관음전(松廣寺 觀音殿)>

관음전은 본래 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 기도처로 건축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옮겨 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고 내부 벽화에 文臣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 있습니다. 또한 내외벽에는 화조도, 산수화 등이 그려져 일반 사찰의 벽화와 뚜렷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입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겠지요.

중생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겨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 중생이 어려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구제를 받는다지요. "觀世音菩薩 南無阿彌打佛"

 

 

<수선사 담장>

구중궁궐이 저리 깊을까, 높고 깊은 저 담장의 전각은 정적처럼 말없이 스님의 참선 속 無憂로 흐르네.

雲霧처럼 드려진 나의 深憂, 그 흐름에 묻혀 저 담장에 하얗게 빗어 내리는 햇살이었음 좋겠네.

 

 

<진여문 (眞如門)>

그 안에 設法殿이 있습니다.

이리 고즈넉한 산사와 아름다운 자연에서 어찌하여 설법이 필요한 건지..

풀 한 포기에서 오묘한 섭리가 보이고 고요한 자연의 숨결에서 마음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임에.. 

 

  

 

높디높은 眞如門 그 안에 무엇 있을까,

하도 궁금하여 계단을 올라 문틈으로 들려다 보았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네.

본시 禪砦에 고요만 흐름을 내 어찌 몰랐던가.. 

 

 

<불이문(不二門)>

양극단을 떠나 일체법을 평등한다는 불이문, 절 안  개의 마지막 문으로, 상대적이고 차별적 상태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 세계 들어서는 상징한다는 문이건만, 瓦塼과 황토로 쌓은 담장을 거느리고 굳게 닫고 있는가, 어찌 외부의 근접을 엄중히 거부하고 있는가 그 안에 높이 솟아있는 說法殿은 높고 높아 다가갈 수 없나니.. 

 

 

정해사 앞 배롱나무(목백일홍)의 멋진 자태에 매료되어 이리 보고 저리 보며 흐르는 시간을 묶습니다.

 

 

아늑한 山寺에 맵시있는 팔작지붕 鶴처럼 날아갈 듯 경쾌하고 고요한 정막을 가르는 스님들의 발길에 햇살이 찰랑이네.

곱고 고운 朱 . 綠 . 褐色으로 곱게 차린 산자락, 자연으로 빚은 한옥, 때로는 문명과 사람도 이리 자연다울 수가 있구나.. 


 

 

<송광사 지장전(松廣寺 地藏殿)>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섰고, 그 좌우로 시왕(十王)이 모셔져 있고 천도재(薦度齋)와 49재, 영가천도 등 각종 齋를 지내는 곳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입니다. 시왕은 인간이 살아 있을 당시 지은 죄의 輕重을 가리는 열분을 가리키며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사십구일까지는 7일 마다 그 뒤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때에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善惡業의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종고루(鐘鼓樓)>

佛殿四物이 걸린 곳입니다. 雲板, 梵鐘, 法鼓, 그리고 木魚가 걸려 있습니다.

 

 

앙증스런 팔작지붕을 한 환풍구..

 

 

고목에 빨강으로 단풍든 담쟁이..  

 

 

<진여문 (眞如門)>

 眞으로 들어가는 문, 진리는 바로 자연 그 자체라네..  진여문(眞如門) 안에 설법전(說法殿)이란 편액이 걸렸습니다. 진리 안에 법이 있고, 법 안에 진리가 있음을 암시하는가 봅니다.

 

 

室月樓

 

 

 

송광사 경내 깊은 곳에 장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정갈한 스님들의 참모습을 보는 듯 마음에 평화를 느낍니다.

 

 

널려있는 메주가 정겨운 웃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송광사 전경입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禪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禪僧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九山禪門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 온 禪宗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하였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골격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깨달는 것으로 합니다.
또한 선종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로 삼는 교종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에게서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종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 도일 스님은 조계 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조계종은 6祖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산선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신라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禪이 중국에서 들어와 산문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 이라고도 하며, 九山禪門은 다음과 같습니다. 

(1)가지산문(迦智山門), (2)실상산문(實相山門), (3)동리산문(桐裡山門), (4)봉림산문(鳳林山門), (5)사자산문(獅子山門), (6)성주산문(聖住山門), (7)사굴산문, (8)수미산문(須彌山門), (9)희양산문(曦陽山門),

 

 

가운데 굵은 기둥을 중심으로 8개의 기둥을 둘려 세워 方形의 기와지붕을 올린 특이한 門입니다.  

 

 

<불일암(不日巖)>

법정스님이 생전에 거처하시던 암자로 가는 길 초입입니다. 대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편백나무 특유의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합니다.

 

 

편백나무 사이에 성글던 대나무들이 어느새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나무 숲 사이를 한 100m 정도 올라오니 불일암 입구이자 대나무로 만든 문이 보입니다. 촌락의 여염집 사립문을 닮았습니다. 소재는 대나무지만..

 

 

문을 들어서니 동굴처럼 좁고 어두운 대나무 숲길입니다. 허리를 굽히고 좀 들어가니 천국에 들어서는 듯 밝고 넓은 불일암 전경이 펼쳐집니다.

   

 

동굴 같은 대나무 숲을 나와 바라본 불일암과 텃밭.

 

 

<불일암(不日庵)>의 모습입니다.

 

 

「 살어리 살어리 낫다. 청산에 살어리 낫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낫다. 」

법정스님의 요사체 불일암 측면 처마 밑에는 판각으로 松江 鄭澈의 靑山別曲의 한 구절이 걸려 있어 생전 법정스님의 청렴 검소함과 무소유의 자연 같은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 댓돌처럼 사용하던 장방형 나무토막 위에 생전에 쓰시던 양은대야와 기왓장에 심어 가꾸시던 양란 한 포기 소담스레 꽃을 피어내고 있습니다. 님은 떠나셨건만...

 

 

간결하고 정갈한 부엌의 무쇠솥은 금시라도 모락모락 뽀얀 김에 서리서리 서릴 것만 같습니다.  문지방은 활 모양으로 線도 곱게 닳아있습니다.

 

 

 

말년에 따사로운 볕을 즐기시려 손수 만드신 의자가 오도카니 놓였습니다. 참! 스님도.. 좀 넉넉하게 만드시지.. 보는 마음 절로 숙연하고 부끄러워 방명록에 이름 석 자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

 

 

스님을 방문 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담소를 나누시던 장소입니다.

 

 

주인 없는 굴뚝에서 금방이라도 뽀얀 연기가 폴폴 솟아나올 것만 같아 머뭇거리게 합니다.

 

 

<제7대 자정국사 사리탑 / 慈靜國師 舍利塔>

불일암은 16국사 중 제7대 자정국사(慈靜國師)가 창건한 옛 자정암(慈靜庵)터에 법정스님이 세운 것이며 불일암 우측 30m 정도 뒤에 이 사리탑이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손수 만드신 목욕간이라고 입구 기둥에 메모가 비닐에 싸여 붙여져 있습니다. 기둥과 아래 벽은 나무로 윗벽과 안 바닥은 대마무로 지붕은 참나무껍질로 만든 너와였습니다.

 

 

앞뜰에는 이랑을 두고 한편에는 고추랑 푸성귀를 일궈 근력예불을 하시고. 또 다른 한편에는 잔디를 심어 근력 후 잠시 땀을 식히는 쉼터로 쓰셨나 봅니다. 

 

 

행랑채 같은 이곳에는 법정스님의 侍奉하던 스님이나 제자가 계신 듯합니다.

 

 

<解憂所>

 

 

철 이른 동백꽃 한 송이 돌아서는 客에게 밝은 미소를 보냅니다.

 

 

다시 대나무동굴로 들어섭니다.

 

 

늦가을 호젓한 산사의 오솔길은 모처럼 참다운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서늘하도록 시원하고 맑은 물 흐르는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인양 세운 그 이름 '淸凉閣' 언제 다시 만날까..

 

 

2010년11월17일 순천 송광사에서,  -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