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새는 여러 과(顆:도장을 세는 단위)가 있으나 화재 등으로 소실됐으며 고종 대의 국새도 일제 강점기,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高宗 代의 국새 3과를 소장하고 있으나 이 국새가 사용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국새(國璽)나 어새(御璽)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어보(御寶)는 왕과 왕비가 돌아가면(崩御) 왕과 왕비의 존호를 새겨 종묘에 안치한 의례용으로
현재 320여 과가 남아 있습니다. 국새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명(明)나라로부터 받아 대명(對明) 관계문서에만 사용하고 세종 때부터는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를 만들어 국내용의 어보(御寶)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후 성종 이후부터는 관리 임용에는 어보를, 교지(敎旨) . 교서(敎書) 등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후 인제(印制)와 그 사용이 매우 문란하여 각 관아(官衙)의 인장들을 다시 주조하여 사용케 하였고 영조 때에 다시 문란해진 보식(寶式)을 정제(定制)하였습니다. 영조는 국새는 대청(對淸) 관계에만 사용하여 왕세손 책봉시에는 이것의 모인(模印)을 만들어 사용하고 통신국서(通信國書)에는 「이덕지보(以德之寶)」를, 관찰사, 방어사들이 부임할 때의 명령서인 유서(諭書)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를 사용케 하였습니다.
고종은 1897년 국새의 명칭을 「대한국새(大韓國璽)」로 바꾸어서 외교문서에 사용하였고 「황제어새(皇帝御璽)」는 포상에, 「제소지보(制誥之寶)」는 고급관리 임명에, 「칙명지보(勅命之寶)」는 통신소서〔通信(言+召)書〕에, 「대원수보(大元帥寶)」는 군국통수(軍國統帥)에 사용하도록 용도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게 주권을 강탈 당했을 때 이 옥새들도 빼았겼다가 1946년 되찾았는데, 6.25전란 와중에 잃어버렸다가 그 뒤 「대원수보」 . 「제고지보」 . 「칙명지보」등 3개는 되찾았습니다.
조선 초 설치한 상서사(尙瑞司)를 세조 때에 상서원(尙瑞院)으로 개칭하여 모든 관인은 이곳에서 만들게 하였습니다.
국새(國璽)
朝鮮 19世紀/ 右 : 대원수보(大元帥寶) 6.6cm , 左 : 제고지보(制誥之寶) 8.9cm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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