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웅진시대 대외교류(熊津時代 對外交流)

鄕香 2009. 10. 31. 00:30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그 아들 문주왕은 고구려 방비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금강수계를 이용한 효율적 對중국 교류의 이점이 있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웅진도읍기 초기에는 남조의 宋이나 북조의 北魏 등과 교류를 시도하였으나 천도 이후 내정이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류의 유일한 통로였던 서해의 해상권을 고구려에 빼앗겨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성왕 . 무령왕대를 거치면서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 남조의 남제와 송 . 양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는 등 활발한 교류를 재개하여, 천도 이후 어려웠던 국가 위기를 중국과의 국제 외교를 통하여 타개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무령왕대에는 고구려에 빼앗겼던 서해의 재해권을 되찾아 對中交流가 재개됩니다. 이와 같은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공주지역의 塼築墳과 무령왕릉의 중국문물들, 그리고 부여 . 익산 . 부안 . 등 금강수계의 거점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도자기들로, 史書에 전하는 중국과의 교섭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公州 宋山里 6號墳 內室)

 

한편, 한성도읍기말 고구려의 평양 천도 후 가속화된 남진정책으로 위기에 봉착한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간의 냉각기를 틈타 이전까지 적대관계에 있었던 신라와 나제동맹(羅濟同盟433)을 맺어 고구려의 압력에 대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성도읍기 말기에 조성된 이와같은 신라와의 화친 분위기는 웅진천도 이후에는 공수동맹 . 혼인동맹 등으로 이어져 더욱강화되었습니다. 신라와 빈번해진 교류의 징표는 주로 웅진도읍기의 왕족무덤인 송산리고분군과 이와 비슷한 시기의 경주의 왕묘급 무덤이나 지방의 수장묘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원두대도, 장식도자, 용문환두대도, 耳飾을 비롯한 무령왕릉계 장신구류, 시유(綠釉)토기, 금박 유리옥 이식 등은 백제로부터의 영향으로, 송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삼엽문투조은제과대는 신라에서 백제로의 교류를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양직공도(梁職貢圖)에 그려진 백제 사신(使臣)>

 

 그런데 신라지역의 경우 백제 문물은 신라 왕경인 경주지역에서도 출토되지만, 오히려 창령지방과 같은 신라의 변경, 즉 대가야 접경지역의 수장묘에서 많이 보입니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 직접적인 교류도 하였지만 가야 수장들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도 빈번하게 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신라지역에서 다종 다양한 백제의 문물이 많이 보이는데 비해 백제지역에서신라 문물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음은 백제의 대신라 교류가 훨씬 적극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4세기 말 ~ 5세기 전반에 각 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재편된 삼국 및 가야 . 왜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고구려-신라연합과 백제-가야-왜 연합세력의 대결국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질서 구도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는 5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5세기 중엽에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으로 화친관계를 회복하고 동시에 이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가야 . 왜와의 우호관계도 지속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가야 . 왜와의 지속적인 화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쌍방간의 교류관계는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백제에서 가야지역으로 전해진 것으로는 백제토기, 귀면과대, 상감기법 등과 f자형 경판부재갈 . 검릉형행엽 등의 마구류, 탄잔형토기, 백제계 주조철부, 귀면 . 귀갑문, 무령왕릉계 환두대도. 대부단면다각형철모, 동완, 이식 등이 있습니다. 또한 백제에서 왜 지역으로 넘어간 것은 백제토기,  무령왕릉계울두 . 무령왕릉계환두대도, 대부단면다각형철모 등의 무기류, 금박 유리옥 . 이식 . 관모 등의 장신구류, f자형재갈과 검릉형행엽 등의 마구류 그리고 동경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반면에 가야에서 백제지역으로 전해진 것은 가여토기와 금동안교 등의 마구류가 있고 왜에서 백제지역으로 넘어간 것은 무령왕 . 왕비의 목관재, 익산 쌍릉의 목관재, 신봉동B-1호묘의 삼각판정단갑과 이단역자도자형철촉 그리고 스에키 개배, 공주 정지산유적 출토의 하지키 . 스에키류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유물의 출토 양상은 백제지역에서 보다는 가 . 왜 지역에서의 백제계 문물이 훨씬 다종 다양하고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백제 . 가야 . 왜 사이의 교류에서 백제가 주도적 역활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百濟 熊津都邑期 / 武寧王陵 出土 / 國寶 第161號 / 俓23.2cm/國立公州博物館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가죽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주위의 원좌 사이에 "宜子孫"이라는 吉祥句가 있고 그 외구에 배치돤 8개의 원화좌 사이에 7마리의 동물문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테두리에는 動物像의 문양대가 있는 獸文緣獸帶鏡입니다. '의자손'이라는 銘文은 초두 . 거울 등 중국 漢代 이래로 진귀한 물품들에 들어가는 문구인데, 무령왕릉에서 함께 나온 다리미와 거의 같은 중국 청동더리미의 손잡이에도 이와같은 길상구가 들어있습니다. 이 거울과 同范鏡으로 알려진 일본 郡馬縣 觀音塚古墳의 거울에 무령왕릉의 방격규구신수문경과 동일한 "... 渴飮玉泉飮食率..."의 길상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거울도 역시 방격규구신수문경과 함께 중국에서 무령왕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거울과 동범경은 5세기말에서 6세기전반의 일본 滋賀縣 三上山 下古墳, 群馬縣 觀音山古墳, 熊本縣 江田船山古墳 등에서 백제계 문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백제에서 七子鏡이 전해졌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거울은 중국-백제-왜와의 교류관계를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동경(銅俓)

百濟 熊津都邑期 / 日本江田船山 古墳 出土 / 俓23.2cm /日本東京博物館  

 

 

중국 도자(中國陶磁)

무령왕른에서는 청자육이호 2점과 흑갈유장경사이병 1점, 백자등장 5점 등의 많은 중국도자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청자육이호 2점은 크기와 세부문양이 약간 다를 뿐 모두 푸른 기를 머금은 유약이 두텁게 발려있는  것으로  둥그스름한 어깨에 6갱,ㅣ 고리모양의 귀가 달려있고 몸체는 연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바닥에는 낮은 굽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흑갈유장경사이병(黑褐釉長頸四耳甁)은 타원형에 가까운 몸체의 어깨에 4개의 귀가 달려있고 좁고 긴목에는 두줄의 돌선으로 장식되었으며, 아가리는 반구형으로 단이 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지니는 도자기는 고대 중국 南朝의 수도였던 南京을 중심으로한 절강 지방의 청자가마, 특히 월주가마에서 많이 출토되어 이 도자기들이 당시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의해 梁에서 가져온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 도자기는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흑갈유병을 제외하고는 한성도읍기 서울 풍납토성 . 몽촌토성 . 석촌동 고분, 천안 화성리 . 용원리 고분, 원주 법천리 고분, 웅진도읍기의 무령왕릉, 익산 임점리 고분,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사비도읍기의 부여 부소산성, 등 모두 백제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당시 백제와 중국의 친밀한 교류관계를 방증해 주고 있습니다.   

 

 

중국제도자기(中國製 陶磁器)

百濟 熊津都邑期 / 武寧王陵 出土 (中國 製品)/  高(左上)21.7cm/國立公州博物館 

 

 

 

흑갈유장경사이병(黑褐釉長頸四耳甁)

百濟 熊津都邑期 / 傳 忠南地方 /  高(左上)23.0cm/ 忠南大學校 

 

 

 

초두(鐎斗)

百濟 熊津都邑期 / 傳 忠南地方 /  高(左上)23.0cm/ 忠南大學校

 

 

 교구(鉸具)

百濟 熊津都邑期 / 武寧王陵 出土 / 長6.7 cm/國立公州博物館 

 

 허리띠장식(銙帶板裝飾)

百濟 熊津都邑期 / 武寧王陵 出土 / 長3.8 cm/國立公州博物館 

 

 수면대금구(獸面帶金具)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慶南 居昌 出土 / 長 2.7 cm/ 日本 東京博物館 

 

 

 삼족기 . 뚜껑 (三足器 . 蓋)

百濟 熊津都邑期 / 傳 公州 상서동 出土 / cm/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귀걸이(耳飾)

百濟 熊津都邑期 / 武寧王陵 出土 / 長 8.3 cm/國立公州博物館 

 

 귀걸이(耳飾)

百濟 熊津都邑期 / 日本江田船山 古墳 出土 / 長 cm/ 日本 東京博物館 

 

 

 귀걸이(耳飾)

百濟 熊津都邑期 / 陜川 옥전 M3號 出土 / 長 7.8 cm/國立金海博物館

 

 관모(冠帽)

百濟 熊津都邑期 / 益山 笠店里 出土 / 高13.7 cm/國立全州博物館

 

 관모(冠帽)

百濟 熊津都邑期 / 日本江田船山 古墳 出土 / 高17.0 cm/ 日本 東京博物館 

 

 

금동신발()

百濟 熊津都邑期 / 益山 笠店里 出土 / 長31.5 cm/ 國立全州博物館 

 

 

 

 

금동신발()

百濟 熊津都邑期 / 日本江田船山 古墳 出土 / 日本 東京博物館 

 

 

 

동완(銅)

百濟 熊津都邑期 / 陜川 옥전 M3號 出土 / 高 8.1 cm/國立金海博物館

 

 

 동완(銅)

百濟 熊津都邑期 / 日本 東京博物館

 

 

 은장오각두대도(銀裝五角頭大刀)

百濟 熊津都邑期 / 論山 표정리 . 南原 두락리 出土 / 長(左) 81.7 cm/ 國立 扶餘  . 全州博物館  

 

    금동투구(金銅胄)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扶餘 出土 / 長(最大) 6.8 cm/ 한남대학교

 

 철제조형장식(鐵製鳥形裝飾)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扶餘 出土 / 長(右) 11.2 cm/ 한남대학교

 

 

 등자(子)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扶餘  出土 / 長 25.8 cm/ 한남대학교

 행엽(杏葉)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扶餘  /日本 東京博物館

 

 행엽(杏葉)

百濟 熊津都邑期 / 傳 扶餘 出土 / 長(右) 20.7 cm/ 한남대학교

 

 

 

 

資料出處 : 國立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