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
「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
「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 〈 나옹선사 懶翁禪師 〉
일전에 다녀 온 칠봉산과 천보산행이 정다운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산행하면 좋겠다는 내 생각이,
다른 이도 다 좋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니기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턱 허니 산행공지를 올려놓고는 실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시간은 시냇물처럼 흘러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눈을 뜨자 하늘부터 시선이 가더라고요. 흐리진 안았는지, 황사라도 몰려오는 건 아닌지, 다행이 하느님이, 부처님이, 성황님이 보우하사 하늘은 맑고 햇살을 하얗게 부서져 내리니 우리나라 만셉니다.^^ 밤사이 함께 가실 분이 더 계신 건 아닌지 컴을 켜 놓고 버너와 코펠을 챙기고 컴 창을 보니 모두 아홉 분, 이 도우미까정 10. 서둘러 전철을 타고는 혹여 형제자매님이 함께 타신 분은 없나 해서 맨 앞 칸에서 부터 확인하는데 만울림님에 이어 아래 칸에서 표주박님 발렌타인님이 함지박 같은 웃음을 보내신다.
아, 이거 반갑습니다.ㅎㅎ
그렇게 지행 역에 도착하여 만울림님과 잠시 짬을 이용해 간단한 먹거리라도 살 참으로 역사 밖 횡단보도 앞에서 건너편을 보니
무지 예쁜 여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게 아닌가!
아니 웬 미인이 나를 점찍나!
가슴이 콩닥콩닥 이러다 심장 터지는 거 아녀!
파란신호가 떨어져 설렘으로 달려가 보니
에 구, 미안해라.^^
이룰 수 없는 여인 내 자매님이었네 ㅜ.ㅜ
다시 역사구내로 오니 한분 두 분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들머리를 향해 힘차게 출발!
한참을 걸어가도 들머리는 보이지 않고, 불안은 스스로에 이길이 맞는거요? 묻기를 몇 번이던가..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는 질문이라도 나올까봐 뒤도 안 보고 빡세게 앞서 가다보니 드디어 들머리가 나온다.
휴우~~ 안심하고 땀을 씻고 들어서는 칠봉산은 폭신폭신한 육산입니다.
육산이란 바위산이 아니라 흙산이란 말이지요.
흙은 여자와 같아서 포근하고 생산하는 것도 푸짐하지요
온갖 나무와 잡초와 꽃과 열매를 맺어 온갖 동물과 곤충에게 먹이를 주고 그들에게 포근한 생산의 요람도 되지요.
그런 칠봉산은 까투리.상수리.졸참.떡갈.등 온갖 참나무가 무성하여 지난 가을에 떨어진 마른 잎 새가
그 폭신함을 더해 발끝의 촉감이 폭신하기가 그리 좋다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날 으는 카펫보다도
그 어느 공단보다도 부드럽고 폭신 거립니다.
님들은 아침이슬에 촉촉한 장미의 봉긋한 꽃 봉우리를 만져 보셨나요.
보드라우면서도 탄력이 감미로운 그 느낌을, 무수히 쌓여 침식된 상록수 잎이 주는 그 폭신함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끝없이 오르고 내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완만한 구릉의 그 낙엽 길은 적당한 습도와 오염되지 않은 태고의 흙이 혼합된 특유의 향긋함이 맑은 공기를 타고 심장의 노폐물을 말끔히 씻어주고 파란하늘의 흰 구름 몇 점 한가로운 풍경에 나도 한 자연으로 융합되어 감이 행복에 겨웠습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등성을 타고 가는 길에 듬성듬성 묘한 신비로움을 주는 바위는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하였지요.
조선후기의 鄭學(鶴)喬가 그린 '괴석도' 보다도 그 모양이 오묘하고 멋스러웠습니다.
그리 다다른 칠봉산 정상 근처 맞춤한 듯 적당한 공터
우측을 보니 벌판에는 동두천의 신시가지가 신기루 마냥 새로움을 주고, 좌측에는 포천의 송우리가 이제 마천루를 향해 용트림을 하는군요. 이곳 칠봉산 정상에서 소모된 체력의 양분을 채우기로 했는데. 초입부터 내내 궁금증을 네게 준 표주박님과 드레곤님의 그 큰 배낭에아이라도 넣어오셨나 해서 유심히 봤지요.
그런데 세상에나 맙소사!
상상을 초월하는 거 있죠! 드레곤님 배낭에선 박통만큼이나 큰 빵 뭉치가 둘씩이나 나오데요. 표주박님 배낭에서 뭐가 나올까? ㅎㅎㅎ 커다란 통하나가 해산하듯 쑤욱 나오기에 냉큼 쳐다보니. 그 큰 통에서 오뎅, 떡살, 만두, 라면 등 등 꾸러미가 산고도 없이 내리 순산하더라고요, 일류 주방장 뺨 치는 참신한 주부 못잖은 솜씨로 그 큰 통에 얼렁뚱땅 끓여 내시는데,
허참, 기가 막혀!
소대원이 먹고도 남을 노리끼한 떡오만라면에서 몽실몽실 실한 김을 토해내고 있더라고요,
그 좋은 것을 보고도 나는 왜 그리 허탈했는지 ㅎㅎ
그저 하늘 한 번 보고 물 한 모금 먹고 여지없는 병아리 신세였지요.
그런데 있잖아요. 이에 질세라 트리,들꽃. 두 자매님의 통통한 맹꽁이 같은 배낭에서 뭉텅뭉텅 나온 魚族에 붉은 생명수와 오늘 나의 보약 같은 고소한 누룽지가 자루로 나오니 한 쪽은 걸쭉한 라면 일식이요. 한 편은 고소한 누룽지 폭폭 끓여서 한정식이었지요.
이리 곱게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 참 보기에 흐뭇했기에,
그 안 쓰기로 한 글도 아닌 뭣을, 이렇게 쓰게 들 하십니다. 그렇게 부끄러움으로 미안함을 덜고자 스스로에 위안하고자. 다시 구비 구비 이어진 천보산길은 진달래가 뾰족 삐죽 봉우리를 맺으며 목화솜 같은 폭신한 탄성을 우리에게 유발시킵니다.
천보산은 이제까지의 칠봉산과는 다르게 아버지와 같은 산입니다. 준엄한 회초리가 있는가 하면 인생의 험난함을 수시로 주시시켜 경험을 쌓게 합니다.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벼랑 그 절묘한 아름다움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또한 생사의 갈림길이 우리의 방심과 허를 노립니다. 따사로운 햇살 그윽한 곳에 파란하늘 흰 구름 몇 점 그 아래 고운 이들의 심성까지도 멈추게 하시려는 듯 우리의 순간을 잡아주시며 애쓰시는 은비님, 언덕님. 들꽃님. 트리님은 송골송골 맺히는 땀도 아랑곳없이 자매형제님들의 한 순간을 추억상자에 열심히 담아두십니다. 에 고- 고마워라 수고 많으십니다. 당신들이 자연이고 꾸밈없는 사랑이고 참 편함이었습니다. 또한 숭고한 숨결로 다가오던 회암사의 유적이 주는 선조들의 지혜와 엄숙함이 옷깃을 여미게 함도 좋았습니다.
사그락 거리며 '구르몽'의 시를 흘리는 감상의 여인 칠봉산과 늠름한 남자의 기백과 절묘하고 기묘함 바위에 가슴 아질리며 서늘함을 담아 낸 남정네같은 천보산의 봄길 이었습니다. 이사람 버너에 물 한 병 달랑 들고 가서 염치없이 흐뭇하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사는 동안 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기만 하였음 하는 욕심을 가져 봅니다. 모두 수고 많으심에 보잘 것 없는 글로나마 고마움을 드립니다.
오늘 일찍 선산에 성묘를 다녀오느라고 인사가 늦었습니다. 양해를 주세요. ♡^福^♧ 2008/4/5일 -鄕-
↑ 화암사를 내려다보고...
↑ 마사토라 길이 좀 미끄럽습니다.
▲ 바위들도 이쁘게 있는 멋진 곳...
밧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오르내린 모양이지요..
<선각왕사비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模造碑 > ↑
이 비는 고려말 명승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우왕3년(1377년)에 건립하였으나 '1997,3.30 성묘격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선각왕사비와 그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비각이 전소하였으며 현재는 초석과 기단만 남아 있습니다. 양주군에서는 국가지정 보물 제387호인 선각왕사비를 '1999년 8월 원형 모습 그대로 모조비를 건립하였습니다.
▲
<선각왕사비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 보물 제387호 (龜部 後面)
고려 말의 승려 선각왕사 나옹(懶翁 1320 - 1376)을 추모하기 위하여 왕의 명령으로 세운 비입니다. 회암사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나옹이 깨달음을 얻어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던 곳이며 공민왕 19년 이후 주지로 머무른 곳입니다. 碑는 어떤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 내용을 돌 등에 새겨 세운 것으로, 불교에서는 禪宗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부도와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비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귀부 - 비몸 - 이수를 갖추고 있습니다. 귀부는 형태가 섬세하지 못하지만 이수에 용조각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동 산 8-1)
▲
앞에서 본 모양... 龜部前面
회암사 전경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의 맥을 형성했던 승려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無學)이 머물며 포교했던 곳으로 유명한 절입니다. 절의 동쪽 능선인 이곳에 세 승려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으로 고려 우왕21년(1372)에 건립되었습니다. ▼↓
<나옹선사(懶翁禪師)> 나옹혜근(懶翁惠勤)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입니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습니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으며,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 宗 師禪敎都摠攝勤修 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습니다. 그는 고려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 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懶翁禪師 浮屠 . 石燈> ▲↑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부도와 석등입니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신앙의 한 형태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부도의 구조는 몸돌을 받치는 기단부와 몸돌 위에 있는 지붕돌 살륜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석등이란 어둡고 깜깜한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서 불성(佛性)을 밝혀주는 법등(法燈)입니다. 대개 절의 중앙에 배치되지만 나중에는 승려들의 무덤인 부도 앞에도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 ▼
<무학대사 碑龜石>
<회암사지 부도 . 檜巖寺址浮屠 (無學大師浮屠) >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무학대사(無學大師1327 - 1405)의 부도로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건립되었습니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 무덤(墓塔)입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은 경배의 대상이나 부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보통 절의 경내 외곽 지역에 위치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 이후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 신앙의 한 형태로 부도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회암사지 부도 . 檜巖寺址浮屠 (無學大師浮屠) > |
<양주시 회암사지 전경 . 楊州市 檜巖寺址 全景>
<양주시 회암사지 . 楊州市 檜巖寺址 >
사적 제128호.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에 의해 1313년(충숙왕 즉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천력연간(1328~29)에 회암사의 절터를 측량했다는 기록으로 인해 지공이 창건했다고도 합니다.
1376년(우왕 2)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지형이 같으므로 가람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이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또한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퇴위 후 한 때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대가람이었으며, 1424년(세종 6)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72년(성종 3)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僧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습니다. 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습니다. 선조 때까지는 기록에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하므로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옛 절터 위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이 있습니다.
<양주시 회암사지 전경 . 楊州市 檜巖寺址 全景>
<양주시 회암사지 전경 . 楊州市 檜巖寺址 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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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仁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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