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高麗時代)/고려역대 왕사(高麗歷代王史)

高麗 歷代 王 23代 高宗 (1192~1259) ~34代 恭讓王(1345∼1394)

鄕香 2008. 2. 22. 22:44

< 23代 高宗 1192(명종 22)∼1259(고종 46) > 재위 1213~1259.

이름은 철, 초명은 진 · 질, 자는 대명(大命) · 천우(天祐). 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柳氏),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하였다. 121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 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왔다.

그리고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 兵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 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며,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이 증시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24代 元宗 1219(고종 6)∼1274(원종 15) > 재위 1260~1274.

이름은 식, 초명은 전, 자는 일신(日新). 고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柳氏)이다.

비는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인 정순왕후(靜順王后)이며, 충렬왕이 즉위하여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하였다. 1235년(고종 22) 태자로 책봉되어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몽고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1260년 왕자 심(諶)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1261년 태자를 몽고에 보내 아리패가의 평정을 축하하였는데, 왕은 그 자신이 태자 때 몽고에 다녀왔고 또 태자를 몽고에 보내는 등 몽고에 성의를 표명하여 원활한 국교수립에 노력하였다. 그해 서울에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하였다. 1263년 홍저·곽왕부(郭王府) 등을 일본에 보내 일본으로 하여금 해적이 고려를 침범하는 것을 단속하여주도록 청하였다. 1264년 몽고가 사신을 보내 친조(親朝)를 요구하므로 몽고에 갔다 돌아왔다. 1267년 감수국사(監修國史) 이장용(李藏用),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 김구(金坵)와 허공(許珙) 등으로 하여금 신종·희종·강종 3대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1268년 환도를 준비하기 위하여 개성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설치하였다. 1269년에는 태자 심을 몽고에 보냈으며, 친몽정책과 개성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林衍)에게 폐위 당하여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이 왕위에 올랐으나, 원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되어 곧 몽고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해에 서경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을 타도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노비와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였다.

1270년 임연이 죽자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를 교정별감에 임명하여 실권을 행사하게 하였으나, 그가 모반하므로 주살하였다. 그해 태자와 더불어 몽고로부터 돌아와 개성환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배중손(裴仲孫)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일으키자 3년 만인 1273년에 진압하였다.

1274년 원나라의 매빙사(媒聘使)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므로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민간의 독녀(獨女)와 역적의 처, 종의 딸 등을 뽑아 보내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시호는 순효(順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경(忠敬)이며 능은 소릉(韶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元史.

 

 

< 25代 忠烈王1236(고종 23)∼1308(충렬왕 34) > 재위 1274~1308.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춘.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비는 원세조(元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齊國大長公主, 몽고명 忽都魯揭里迷失公主), 구비(舊妃)는 시안공인(始安公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 풍속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하여 고려인들은 탄식, 우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 발호에 억눌려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즉위년 10월 일본정벌이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 대마도는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감행된 2차 정벌도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났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의 죽음으로 동정은 그쳤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여당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와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할 것을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이 싸움은 1년반 만에 원병의 협력으로 끝났는데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에까지 침입하였으며, 이때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이 컸다. 이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다. 원나라의 압력 밑에서도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여 최탄(崔坦)이 몽고에 反不함으로써 생긴 동녕로(東寧路)를 원세조에게 직접 환부요청을 하여 1290년 돌려받아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고,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고에 함락되어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가 분수에 넘친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王)을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으며, 선지(宣旨)도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또한, 일본정벌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밖에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으니 몽고식 기병이 야간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가 되었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지(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 등이 있고,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私屬人) 등이 있었다. 이곳 소속 관원들은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고,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여 부역에 시달려 도망하는 양민을 모아 농장(農莊)을 경영하고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어 양민을 괴롭혔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이로써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특히 심하였다.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는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의 무리에 귀기울여 왕위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동조하여 1305년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이 커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짐으로써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실권은 세자에게 빼앗기고 1308년에 죽으니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國李相國集 . 元史.

 

 

 

< 26代 忠宣王 1275(충렬왕 1)∼1325(충숙왕 12) > 재위 1308~1313.

이름은 장(璋). 초명은 원,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몽고명은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 비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몽고명은 보다시리(寶塔實憐)〕,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이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봉해지고, 1295년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 이듬해 11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혼인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297년 5월 병사하자 7월 문상하러 온 세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를 빙자, 세력을 떨치던 궁인 무비(無比)와 그 당류 최세연(崔世延)·도성기(陶成器) 등 40여명을 공주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참살, 유배하는 대숙청을 단행하고 이듬해 정월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총명과 견식이 남달랐던 왕은 일찍이 수렵을 가는 부왕을 울며 말리기도 하고, 땔나무를 지고 궁으로 들어온 자의 의복이 남루함을 보고 마음 아파 하기도 하였다. 총명이 너무 과하다는 진언에 “나를 어리석게 하여 손에 든 떡처럼 마음대로 주무를 작정이냐.”고 호통을 치고, 왕권대행시에는 세력가들에게 땅을 빼앗겨 호소하는 백성들의 토지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즉위한 뒤에도 나타나, 즉위 직후(1298.1.) 곧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고려가 당면하고 있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함을 내용으로 하는 30여항의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그것은 합단(哈丹) 침입시에 공을 세운 원주(原州) 고을사람들에 대한 포상과 조세·부역을 3년간 면해줄 것, 공신 자손들에 직(職)을 주고 공신전(功臣田)을 환급해줄 것, 모든 관리의 직급을 한 계급 올려주고 중형죄(重刑罪)를 제외한 위법자는 양용(量用)하도록 할 것, 지방에 묻혀 있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세력을 빙자하여 5품직에서 3품 이상의 직을 뛰어 제수받은 자, 또는 세가(世家)의 자제이기 때문에 직을 받은 자, 또는 왕을 호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것을 공이라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선법(選法)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인사행정 외에도 지방행정에 과감한 혁신을 꾀하여 근래에 잦은 사고로 특수임무를 띠고 별감(別監)이 파견되어 일어나는 민폐와 지방장관(按廉·守令)들이 세가(勢家)에 바치는 은·쌀·포(布)를 금하게 하였고, 또 안렴·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선물받는 것, 수령이 멋대로 임지를 옮기는 것을 금하였으며, 홀치(忽只)·응방(鷹坊)·아가치(阿車赤)·순마(巡馬) 등 원나라와의 관계(官階)로 인하여 설치된 관청의 관원들이 받는 증여물도 일체 금하였다.

이밖에도 부역에 시달려 농토를 떠난 자들의 토지를 모으거나 함부로 사패(賜牌)라 칭하여 절이나 양반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農莊)을 만든 세력가의 땅을 환수하게 하고, 막대한 이(利)가 있는 염세(鹽稅)와 외관노비(外官奴婢)들이 세력가에 의하여 탈취되는 것을 금하는 경제시책을 폈다. 또한, 세력가에 붙어서 자기의 역(役)을 다하지 않은 백성이나 향리를 본래의 역에 돌아가게 하고, 양민으로서 세력가에게 눌려 천민이 되는 등 사회의 신분적 혼란이 야기되는 사회적 적폐도 제거하도록 하였다.

즉, 원나라와 관계를 맺은 뒤로는 매잡는 것을 일삼는 응방을 이용하고 몽고어를 익혀 재상이 된다든가, 원공주의 겁령구(私屬人), 또는 환관(宦官)으로 원나라에 보내졌다가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거나 사신으로 귀국하여 그 세력으로 재상이 된다든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공이나 군공(軍功)으로 군졸에서 몸을 일으켜 재상이 된다든가 하여 과거의 문벌귀족과는 다른 새로운 권문세가가 됨으로써 신분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 세력을 이용하여 많은 부를 누리는 자가 있었다. 왕의 교서에서 이들이 정치·경제·사회의 폐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어, 교서의 목적은 이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4월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해오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한림원(翰林院)에 합치고, 5월에는 전면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개혁된 관제는 광정원(光政院)·자정원(資政院)·사림원(詞林院) 등 일찍이 이름을 볼 수 없던 독자적인 것이거나 충렬왕 1년 원나라의 간섭하에 고친 관제 이전의 형태(侍中, 左·右僕射 등)로 복구된 것이었다.이 중 특이한 것은 사림원인데 사림원은 왕명의 제찬(制撰)을 맡은 한림원을 강화한 것으로 여기에 정방이 맡고 있던 인사행정, 승지방(承旨房)이 맡고 있던 왕명의 출납(出納)을 더하여 권력기관화한 것으로 박전지(朴全之) 등 신진학자인 4학사(學士)에 의하여 관장되었다. 이 관제개혁 속에는 반원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때맞추어 일어난 원나라 공주 출신인 왕비의 질투로 인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은 세력가의 억압으로 인하여 신흥귀족의 공격 목표가 되고, 반원적 요소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어, 드디어는 즉위년 8월 원나라로부터 강제 퇴위를 당하여 원나라로 가게 되었으며, 이로써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가 왕은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원나라에 장기간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는 즉위 전부터 있던 왕 부자간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1299년 충선왕파로 여겨지는 쿠라타이(고려명 印侯)를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났고,

이어 충렬왕파에서는 왕유소(王維紹)·송린(宋麟)·석천보(石天補) 등이 주동이 되어 부자간을 이간시키며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고 왕위도 세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고 환국(還國)을 저지하는 운동도 일으켰다.

이 불화는 1305년 충렬왕이 전왕 폐위를 직접 건의하러 원나라로 감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성종(成宗)이 후계자 없이 죽어 황위쟁탈전이 일어나자 충선왕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하이샨(海山:武宗)을 도와 옹립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졌고 따라서 왕유소 일당을 처형하여 부자간의 싸움은 끝이 났다. 이로써 고려 국정의 실권은 다시 충선왕에게로 돌아갔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그해 7월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한 왕은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장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즉위교서에 필적하는 혁신적인 복위교서를 발표하여 또 한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던 관계로 곧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복위한 지 두 달 후인 11월 제안대군 숙(齊安大君淑)에게 왕권 대행을 시키고 원나라로 감으로써 혁신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위기간에는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각염법을 제정하여 소금을 전매하게 함으로써 한해에 포(布)4만필의 국고수익을 늘리게 하였고 토지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의 반대로 고쳤고, 또 여러 번 관제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로 끝났다. 오랫동안의 재원생활(在元生活)로 본국에서 해마다 포 10만필, 쌀 4, 000곡(斛), 기타 헤아릴 수 없는 물자를 운반하게 함으로써 폐해가 극심하여 본국 신하들이 귀국간청을 빈번히 호소하고 또 원나라에서도 귀국명령을 하였으나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1313년 둘째 아들 강릉대군 도(江陵大君燾)에게 전위하고 이해 6월 잠시 귀국하여 아들 충숙왕을 즉위시키고 이듬해 다시 원나라로 갔다.

이때에 만권당(萬卷堂)을 연경(燕京)의 자기 저택 안에 세워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 등 원나라의 명유(名儒)를 불러 경사(經史)를 연구하게 하고 본국에서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그들과 교유하게 하여 문화교류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도의 대가 조맹부의 글씨와 서법은 그로 인하여 고려에 크게 퍼졌다.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 모후(母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본국의 수령전(壽寧殿)을 절로 만들기도 했으며

특히 1316년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에게 물려준 뒤에는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고 멀리 보타산(寶陀山)에 불공을 드리러 가기까지 하였다. 1320년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고려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任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토번(吐蕃)에 유배되었으며, 1323년 태정제(泰定帝)의 즉위로 유배에서 풀려 원나라에 돌아가 2년 후 죽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며, 능은 덕릉(德陵: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益齋亂藁 . 元史 . 高麗忠宣王의 元武宗擁立(高柄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忠宣王(高柄翊, 韓國의 人間像 1, 1965) .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李起男, 歷史學報 52, 1971).

 

 

< 27代 忠肅王 1294(충렬왕 20)∼1339(충숙왕 복위 8) > 재위 1313∼1330, 1332∼1339.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몽고인 의비(懿妃;몽고 이름은 也速眞)이다.

비(妃)는 원나라 영왕(營王) 야광티무르(也光帖木兒)의 딸 복국장공주, 원나라 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몽고인 경화공주(慶華公主),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德妃) 등 네명이 있다.

 

1299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에 왕위를 전위(傳位)받아 돌아와서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1314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워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고 또 민지(閔漬)·권보(權溥)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릉도존무사사(江陵道存撫使司)를 명주(溟州:지금의 江陵)에서 등주(登州:지금의 安邊)로 옮겼으며,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양광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를 경상도, 교주도(交州道)를 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조카인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어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되자, 고는 고려의 왕위를 넘보는 등 복잡한 관계를 자아내게 되었다. 1318년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또, 그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그 이자가 원본(元本)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안향(安珦)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심양왕 고는 왕위찬탈의 뜻을 품고 원나라에 무고를 하여 왕이 불려가 그곳에서 5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였으며, 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켜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 고(暠)에게 넘겨주려하다가 한종유(韓宗愈) 등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1332년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하여 폐위되자 복위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가 지나치게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貢女)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심양왕과의 정권다툼에 시달리고, 원나라에서 5년 동안이나 체류하고 돌아온 뒤에는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아니하였다. 성품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고 침착, 총명하며, 속문(屬文)을 잘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다. 시호는 의효(懿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능은 의릉(毅陵: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28代 忠惠王1315(충숙왕 2)∼1344(충혜왕 복위 5)> 재위 1330∼1332, 1339∼1344.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가 있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적)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元史.


 

 

 

< 29代 忠穆王1337(충숙왕 6)∼1348(충목왕 4)> 재위1344~1348.

이름은 흔(昕), 몽고 이름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 충혜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州)이다.

어려서 볼모로 원나라에 가 있다가 1344년 충혜왕이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총명하여, 원나라의 순제(順帝)는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뒤이어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으로 임명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곧 신료(臣僚)들을 계고(戒告)하여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을 위무·구휼하는 한편 선왕(先王)때 아첨하던 폐신(嬖臣)들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 기(祺:뒤의 공민왕)를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현(玹)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상서(上書)에 따라 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내승(內乘)·응방(鷹坊)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덜었으며 서연(書筵)을 열었다. 또한, 선왕이 지은 신궁(新宮)을 헐어 숭문관(崇文館)을 짓게 하고, 권신에 의하여 빼앗겼던 녹과전(祿科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금마군(金馬郡)이 기황후(奇皇后:元나라의 順帝妃)의 외향(外鄕)이므로 익주(益州:지금의 益山)로 승격시켰다. 1346년에는 이제현 등으로 하여금 앞서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게 하고, 또 충렬·충선·충숙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1347년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두고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煦), 좌정승 김영돈(金永旽) 등 33명을 속관(屬官)으로 삼아 여러 도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기황후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의 옥사를 계기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1348년에는 진휼도감(賑恤都監)을 두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시호는 현효(顯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능은 명릉(明陵: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整治都監의 性格(閔賢九, 東方學志 23·24, 1980).

 

 

< 30代忠定王 1337(충숙왕 복위 6)∼1352(공민왕 1)> 재위 1349~1351.

이름은 저(몽고명은 迷思監朶兒只). 충혜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尹繼宗)의 딸인 희비윤씨(禧妃尹氏)이다. 1348년에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가 그해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이듬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희비의 부(府)를 세워서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1350년에 왜구가 고성(固城)·죽림(竹林)·거제(巨濟) 등에 침입한 것을 합포(合浦:馬山)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등이 물리쳤는데, 이로부터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순천부(順天府)에 침입하여 조선(漕船)을 약탈하기도 하고 뒤이어 합포·장흥(長興)·동래(東萊) 등지에도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이권(李權)을 경상·전라도도지휘사(慶尙全羅道都指揮使), 유탁(柳濯)을 전라·양광도도순문사(全羅楊廣道都巡問使)로 삼아 왜구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왜구의 피해에 대비하여 진도현(珍島縣)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한편, 안으로는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이 횡포를 부려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다. 또, 그해 운남왕(雲南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1351년에 왜구가 자연도(紫燕島:仁川)·남양(南陽)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 그해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왕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나라에 청하여 강릉부원대군 기(江陵府院大君祺:공민왕)를 왕에 오르게 하고 그는 강화에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독살을 당하니 나이 15세였다. 총릉(聰陵:開城)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31代 恭愍王1330(충숙왕 17)∼1374(공민왕 23)> 재위 1351~1374.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사이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 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14세기 후반,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제거하고, 잃어버린 국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허약하게 만든 친원파를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즉,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보낸 뒤 처형하였다.

그 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1373년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가 있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있다. 

 

 

< 32代 禑王 1365(공민왕 14)∼1389(공양왕 1)> 재위 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전해진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그의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신돈이 주살된 직후에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서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 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 高麗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 李仁任政權에 대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 33代 昌王 1380(우왕 6)∼1389(공양왕 1) > 재위 1388~1389.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가에 의하여 크게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여,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으로부터 사선(私膳)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치죄 하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토지제도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행하게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 驪州郡)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또,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1389년 1월 경상원수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또,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관(兼官)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청으로 주 · 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유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였다. 또, 그해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 뒤 이성계 등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두 왕을 모두 폐위시켰다가,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34代 恭讓王 1345(충목왕 1)∼1394(태조 3) > 재위1389~1392.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얼마 후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太祖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