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代 太祖王建(877(신라 헌강왕 3)∼943(태조 26) 재위 918∼943 >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하여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친히 저술하여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하여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이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 2代 惠宗 914(신덕왕 1)∼945(혜종 2) 재위 943~945 >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태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강력한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한편, 그의 이복동생인 요(堯: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하여 은근히 왕위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 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어,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죽였다. 이무렵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갑곶(강화)에 유배된 뒤 곧이어 살해되었는데, 요 일파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종이 죽은 뒤에 요가 새 왕이 되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高麗惠宗代의 政變(河炫綱, 史學硏究 20, 1968) .
高麗惠宗朝 王位繼承戰의 新解釋(姜喜雄, 韓國學報 7, 1977).
< 3代 定宗 923(태조 6)∼949(정종 4) 재위 946~949 >
이름은 요(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충주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고, 비(妃)는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朴氏)와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朴氏)이다.혜종의 뒤를 이어 945년에 즉위하여 서경의 진장(鎭將) 왕식렴(王式廉)의 도움으로 왕규(王規)·박술희(朴述姬)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러한 사실은 혜종 사후에 전개된 일련의 호족들의 발호를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은 여전히 반발하여 왕권이 확고한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도참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서경천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던 것으로, 결국 이 계획은 좌절되고, 왕권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불교를 깊이 믿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高麗惠宗代의 政變(河炫綱, 史學硏究 20, 1968) .
高麗惠宗朝 王位繼承亂의 新解釋(姜喜雄, 韓國學報 7, 1977).
<4代 光宗 925(태조 8)∼975(광종 26) 재위 949~975 >
태조의 아들이며, 모후(母后)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고, 정종의 친동생으로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이다. 광종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에 비하여 여러 면에서 대조되며, 우선 재위기간도 혜종이 2년, 정종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광종은 26년간 재위하였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은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강력한 세력기반에 의지하여 왕권을 부지하였으나,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쌓아 왕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강화를 위하여 가장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둔 왕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그의 치적은 광종 즉위년∼광종 7년, 광종 7년∼광종 11년, 광종 11년∼광종 26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와 직접 관련되는 시책은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의 정치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최승로(崔承老)가 그 상소문에서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夏·殷·周의 3대)에 견줄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이러한 국내외의 정책을 통해서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시기에는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의 안검법(按檢法)을 세웠으며, 958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였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필연적으로 호족세력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광종은 철저한 탄압을 강행하였다. 956년부터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중국 후주(後周)출신의 쌍기(雙冀)의 등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광종에게 왕권강화책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보좌한 사람은 바로 쌍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우선 쌍기를 중용한 같은 해에 노비안검법을 세운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쌍기는 후주에서의 왕권강화책의 경험을 고려사회에 살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자, 광종이 이들을 귀양보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자, 영어(囹圄)가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왕권안정에 대한 집념은 매우 강렬하여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과 친인(親姻)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고,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비명에 죽게 하였다. 왕권강화책 추진에 필요한 독자적인 세력기반 육성에 주력하여,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이와같은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정치적 적대세력의 반발도 거세어서 왕권강화책을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전생애에 걸쳐 왕권강화책을 추진한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일찍이 광종은 ‘광덕(光德)’·‘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고, 만년에는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 집념을 엿볼 수 있다.아울러 국가체제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나타났다. 첫째, 광종대의 왕권은 중앙정부 중심으로서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호족세력을 철저히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의 완전한 굴복과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그가 죽고 경종이 즉위한 초에 대대적인 반 광종운동이 일어난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이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가지 시책을 펴기도 하였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 · 왕사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의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치적은 뒤에 고려가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기에 그의 치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지금의 開城 狄踰峴)이다.
<5代 景宗 955(광종 6)∼981(경종 6) 재위 975~981 >
이름은 유,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부왕인 광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된 호족세력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왕과의 관계마저 원활하지 못하여 불안하게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종은 독자적으로 정권을 담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즉위초에 왕선(王詵)을 집정(執政)으로 삼아 정권을 맡겼다.이와 전후하여 광종 때에 참소당한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허락하자, 서로 함부로 죽이는 사태가 발생, 새로이 원성이 드높아졌다. 이와같은 사태 발생을 통하여 광종 때 왕권의 한계성을 엿볼 수 있다. 즉, 광종은 그의 전생애를 바쳐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경종 즉위 초에는 곧 잔존한 구세력에 의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976년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왕선은 복수를 빙자하여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함부로 죽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왕선을 귀양보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복수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와 동시에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우집정(右執政)으로 삼고, 모두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정치권력의 독주를 막고, 이를 분산시키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종 때의 정치적 업적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제정한 것이다. 976년 처음으로 제정된 전시과는 제도적으로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그것이 고려 전기 토지제도의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었다. 976년의 전시과는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에 따라 제정한 것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외형상 940년(태조 2)에 제정된 역분전(役分田)과 비슷하다. 역분전은 그 지급기준을 관계(官階)에 두지 않고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역분전과 다른 점은 976년의 전시과는 전시(田柴)의 지급대상자를 사색공복제(四色公服制)에 의하여 우선 네 계층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관품과 인품을 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변화는 광종 때 추진된 왕권강화책과 국가체제 정비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즉, 경종은 광종이 닦아놓은 치적을 바탕으로 역분전보다는 발전된 토지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던듯하다.
한편, 경종은 977년 친히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高凝) 등 여섯 사람의 급제자를 뽑았으며, 중국 송나라와의 국교도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979년 발해인 수만명의 내투(來投)가 있었으며, 청새진(淸塞鎭:지금의 熙川)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이처럼 몇 가지 치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경종은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성색(聲色)에 몰두하였으며, 위기(圍碁)를 좋아하여 정교(政敎)가 쇠잔하였다. 그의 정치적 태도는 이미 즉위초에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보(金傅)에게 상보도성령 식읍일만호(尙父都省令食邑一萬戶)의 봉작을 더한 것으로 보아, 신라계 정치세력을 두둔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편 그의 모후인 대목왕후 황보씨로 대표되던 지방호족계통 정치세력도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경종 즉위 초의 반광종(反光宗)의 기운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980년 왕승(王承) 등의 모역(謀逆)이 있었으나,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미리 대비하여 왕승 등을 잡아 죽이고 위기를 넘겼다.
981년 7월 병이 위독해지자 종제(從弟)인 개령군 치(開寧君治:成宗)에게 왕위를 넘겼다. 시호는 헌화(獻和)이며 능은 영릉(榮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高麗土地制度史硏究(姜晉哲, 高麗大學校出版部, 1980).
<6代 成宗 960(광종 11)∼997(성종16) 재위 981~997 >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古).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戴宗) 욱(旭)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柳氏)이다. 981년 경종의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는데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史上柱國) 최승로(崔承老) 가 시무(時務) 28조(條)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지방제도의 정비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983년(성종 2)에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지방관의 설치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 있었던 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12목의 설치와 함께 금유(今有)·조장(租藏)은 혁파되었다.
12목의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였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986년에는 12목에 대하여 처음으로 처자(妻子)를 데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12 목사와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사람을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93년(성종 12)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으니, 지방 각 관청의 경비 지출을 위한 공해전시의 법을 정비하는 등 지방제도의 정비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지방행정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와같은 지방행정의 정비·강화는 지방세력 통제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우선 12목이 설치되던 983년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이직(吏職)개편이 단행된 것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뒤에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책은 여러가지 형태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특히, 995년(성종 14)의 지방관제 개편은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995년의 지방관제 개편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10도제(道制)의 실시이다. 당(唐)의 10도제를 모방하여 제정한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의 10도제는 곧 그 실시과정에서 유명무실해지는 약점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도제(道制)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로의 개편이었다. 즉, 종래의 12목을 12절도사로 개편한 것은 지방행정에 있어서 군사적인 면을 크게 강조하고자 한 의지의 반영이었다. 절도사체제로의 개편은 군정적인 지방행정을 통하여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함으로써 완전한 중앙집권을 하고자 꾀한 조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의 치적으로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비였다. 흔히 삼성체제(三省體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개혁은 이미 982년부터 시작되었다. 즉 태조 이래의 정치기구를 중국식 제도로 개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관(兵官)·민관(民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중앙관제는 995년에 다시 삼성육부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관제내용은 998년(목종 1)에 개정된 전시과(田柴科)관계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성종은 이처럼 새로운 정치체제를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마련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시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 여건의 성숙과 발전이 그러한 선진제도의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임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숭유억불책 즉, 고려 건국 이래 엄청나게 늘어난 새로운 정치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정치체제로서는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성격은 그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성종대 전반기에는 신라 6두품 계통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의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가, 그 후반기에는 이들 대신 개국공신 혹은 호족계열의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신라시대에 비하여 권력구조의 핵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층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성종은 이와같은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선진제도를 도입하고, 정치·교육의 지도이념으로서 유교적 이념을 채택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성종은 유학을 숭상하고 억불정책을 위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시켰는데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유교주의적 정치이념을 펴기 위하여 노력하였나를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정치이념의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자 애썼다. 가령 992년(성종 11)에 교(敎)를 내리기를 “학문을 많이 쌓지 아니하면 선(善)을 알 수 없으며, 어진 이를 임용하지 아니하면 공을 이룰 수 없다. 이로써 서울에는 서상(序庠)을 열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를 권과(權課)하며, 문예를 경쟁하는 장소를 열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업을 넓혔으나, 오히려 포부를 가진 뛰어난 선비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진 이를 가로막고 재능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어찌 알리요. 무릇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대궐에 나와서 자천(自薦)함을 허한다.” 라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교를 내려 “경관(京官)5품 이상에게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고, 그 덕행(德行)과 재능은 성명 밑에 기록하여 아뢰어라”한 것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성종은 재위기간 중에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태학에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로써 어진 사람을 구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등,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책을 정력적으로 편 결과 새로운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993년(성종 12)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서희(徐熙)의 외교적 성과로 거란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얻어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997년 10월에 병이 위독하여지자 조카인 개령군 송(開寧君誦: 穆宗)에게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시호는 문의(文懿)이고, 능은 강릉(康陵: 京畿道 開豊郡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高麗遺族社會의 形成(李基白, 한국사 4, 1974) .
崔承老의 時務 28條에 대하여(金哲埈, 趙明基紀念佛敎史學論叢, 1965)
<7代 穆宗 980(경종 5)∼1009(목종 12) 재위 997~1009 >
이름은 송(訟). 자는 효신(孝伸). 경종의 큰아들로서,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경종이 죽었을 때 겨우 2세여서 당숙인 성종이 뒤를 잇고, 성종이 그를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하고, 후사로 지명된 뒤 7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첫해 12월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 과거시행법을 정하는 등 자못 왕정체제의 확립을 꾀함이 있었으나, 시종 모후(母后)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009년 정월 모후와 김치양이 그들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태조의 손(孫)으로서 유일하게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해치려는 움직임이 있자, 재신(宰臣) 최항(崔沆)·채충순(蔡忠順) 등에게 대량원군을 자신의 후사로 영립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입위(入衛)를 명하였다 .대량원군의 영립은 마침내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도리어 김치양 일당을 제거한 강조에 의해 폐위당하여 태후와 함께 충주로 가던 중 적성(積城)에서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시호는 선녕(宣寧)·선양(宣讓)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金致陽亂의 性格(李泰鎭, 韓國史硏究 17, 1977).
<8代 顯宗 991(성종 10)∼1031(현종 22) 재위 1010~1031 >
자는 안세(安世). 태조(太祖)의 여덟째아들인 안종욱(安宗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고려왕조가 성립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 十訓要〉 등을 통하여 제시하였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하여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들어서면서 구체화되었던 동시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이때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하여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특히 태조 이래 북방외교의 현안문제였던 대거란(對契丹)관계가 현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을 보게 된다. 현종의 대거란정책은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과 제3차 침입(1018년)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6주의 반란을 요구하여 제3차침입을 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하였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게 구주(龜州)에서 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하여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고려는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000여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참고문헌高麗史 . 高麗史節要.
<9代 德宗 1016(현종 7)∼1034(덕종 3) 재위 1031~1034 >
이름은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고, 비는 현종의 딸 경성왕후(敬成王后)와 효사왕후(孝思王后), 그리고 왕가도(王可道)의 딸 경목현비(敬穆賢妃)이다.1020년(현종 11)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진 뒤 1022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031년 중광전(重廣殿)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강감찬(姜邯贊)이 죽자 현종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설치하고 육운십운시(六韻十韻詩)로 시험하여 합격자를 냈으며, 입춘 뒤의 벌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1032년 거란의 사신이 내원성(來遠城)에 오자 받아들이지 않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영인진(寧仁鎭: 함경남도 영흥군)·파천(派川: 함경남도 안변군)에 성을 쌓았다. 이에 앞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압록강의 성교(城橋)를 헐고 억류된 우리 사신의 송환을 청한 바 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는 등 거란과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그해 왕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던 것을 응천절(應天節)이라 고쳤다. 또,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착수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1033년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로 하여금 압록강 어귀에서 서북면(西北面)의 위원(威遠: 평안북도 의주군)·정주(靜州:同上)·운주(雲州: 평안북도 운산군)·안수(安水: 평안남도 개천군)·청새(淸塞: 평안북도 희천군)·영원(寧遠)·맹주(孟州: 평안남도 맹산군)·삭주(朔州) 등의 13성(城)과 동북면(東北面)의 요덕(耀德: 함경남도 영흥군)·정변(靜邊: 同上)·화주(和州: 同上) 등의 3성을 연결하여 동해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관성(關城)을 쌓게 하였는데, 1,000여리가 되는 석성(石城)으로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1034년 양반 및 군한인(軍閑人)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그해 병으로 아우 평양군(平壤君)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경강(敬康)이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경기도 개성에 있다. 참고문헌高麗史 . 高麗史節要
<10代 靖宗1018(현종 9)∼1046(정종 12) 재위 1034~1046 >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아들로 덕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김은부(金殷傅)의 딸인 원성왕후 김씨(元成王后金氏)이고, 비(妃)는 용신왕후 한씨(容信王后韓氏)·용목왕후 이씨(容穆王后李氏)·용의왕후 한씨(容懿王后韓氏)이다. 1022년(현종 13)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하여졌고,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이 되었으며, 1034년에 동복형인 덕종의 유명으로 즉위하였다.
즉위년 12월 팔관회를 열어 송나라 등 외국상인들에게도 예식을 관람시키는 상례를 만들고, 1035년 서북로(西北路)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고, 현재의 평안북도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 창주(昌州)라 이름하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으며,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수리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 1037년 압록강 일원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듬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책봉을 받았으며, 이후 북방경비에 주력하여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하였으니, 이는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것이었다.
1039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고, 1045년 악공(樂工)과 잡류(雜類)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듬해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하였다. 1045년 비서성으로 하여금 《예기정의 禮記正義》·《모시정의 毛詩正義》 등을 간행하여 문신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고,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놓게 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형·방(昉)·경(璥)·개이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휘(徽:문종)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어질고 효우(孝友)한 데다 학식과 도량이 크고 넓으며 영특하고 과감하였다. 거란과 다시 화친하여 나라가 태평하였으며 유명으로 능침을 검소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주릉(周陵)이며, 시호는 용혜(容惠)이다.
참고문헌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11代 文宗 1019(현종 10)∼1083(문종 37) 재위 1046~1083 >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 현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다.
제10대왕 정종은 그의 형으로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하여 정종의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책봉되었다.
그의 재위 37년간에 고려의 문물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불교·유교를 비롯해서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보았는데, 이것은 신라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의 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한 창조적 고려문화를 형성한 것이었다.문종의 치하에서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갱정(更定)되고 관제가 개편되며 백관의 반차(班次)와 녹과(祿科)가 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정치·경제의 여러 제도가 완비되었다.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는 송제(宋制)를 모방, 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나, 대개의 경우 수입된 제도는 고려의 실정에 알맞게 수정되어 실시되었다.특히,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의 상태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 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다.지방통치체제도 성종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점차로 정비되어나갔는데, 현종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진사·진장의 수가 늘어나고 남방의 제도(諸道)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의 완비는 물론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문종의 치적과 그 재위기간중의 중요한 사건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년(1047) 시중 최충에 명하여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에 대하여 상세한 고정(考定)을 가하였는데,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法)이 크게 정비되었다. 3년(1049)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여 양반 신분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정하고, 4년(1050)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였으며 또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재면법은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인 경우 조·포(布)를 면하고, 7분인 경우 조·포·역(役)을 모두 다 면제해주는 법제였다.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한 결과 피해의 정도에 따라서 조세를 경감, 조절해주었다.16년(1062)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해서 죄수의 신문(訊問)에는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17년(1063) 국자감 제생(諸生)의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하여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의 재학기간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하여 재학 기간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이 규정되어 결(結)의 면적이 확정된 것도 문종 23년(1069)의 일이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한 것이다.
이 양전척(量田尺)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고주척(古周尺, 19.8㎝)은 아닌 듯하며, 이 양전척에 의하여 산정되는 결의 면적은 약 1만7천평(坪)·6, 800평·4, 500평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해 또 종래 1결에 대하여 5승(升)을 징수하던 전세(田稅)가 7승(升) 5홉(合)으로, 10부(負)에 대해서는 7홉5작(勺)으로 각각 인상되었다.
고려의 전품(田品)에 관해서는 문종 8년(1054) 해마다 경작하는 불역지지(不易之地)를 상전(上田)으로 하고, 1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일역지지(一易之地)를 중전(中田)으로 하고, 2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재역지지(再易之地)를 하전(下田)으로 하는 3등급의 전품제(田品制)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 전품제가 산전(山田)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혹은 산전·평전(平田)에 고루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서로 엇갈려 있다.가령, 이 전품제가 산전에만 적용되고 평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면, 평전에서는 이미 세역휴경(歲易休耕)의 농법이 아니라 상경연작(常耕連作)하는 농법이 시행되어 있었다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를 거쳐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종 23년(1069) 그 면적이 확정된 전결(田結)이 재래와 같은 동적이세(同績異稅)의 면적단위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조선시대와 같은 이적동세(異積同稅)의 수세단위를 말하는 것인지, 이 문제도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양반전시과가 갱정되어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고 또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 실시되는 것도 문종 30년(1076)의 일인데,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보내어 출신지방의 계문(啓聞)에 대비한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된 것은 이듬해의 일인데, 이것도 물론 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종의 치하에서 또 주목되는 것은 23년(1069) 경기의 범위가 확대되어 종전의 13현이 4배로 늘어나 50여현으로 팽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기의 확대는 종래 양반전시과의 개편을 앞두고 양반의 전시지(田柴地)를 왕경의 주변인 경기의 땅 안에서 확정 지급하기 위한 조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왔는데, 현재로서는 양반에 지급된 과전(科田)은 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도(下道)전역에 걸쳐 지급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시되어 있으므로, 경기확대의 이유와 동기는 앞으로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또, 남반직(南班職)의 최고위가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떨어져 격하된 것도 문종대의 일인데, 이것은 문무 양반에 비하여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의 우월성이 정착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4년·6년·18년·22년·27년에 각각 변방에서 동여진(東女眞)의 침구를 보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대여진관계는 대체로 평온하여 여진측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하였으므로 후일에 보는 큰 변동은 아직 예측되지 않았다. 문종은 고려 전기의 문물제도가 완비되는 문화적 황금기를 상징하는 영매한 국왕이었다.장지는 경릉(景陵), 시호는 인효(仁孝)이다.
참고문헌高麗史 . 高麗史節要.
韓國史―中世篇―(李丙燾, 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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