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代 順宗 1047∼1083 >
초명은 휴(烋),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 문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이며, 비는 평양공기(平壤公基)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 김양검(金良儉)의 딸 선희왕후(宣禧王后), 이호(李顥)의 딸 장경궁주(長慶宮主)이다.1054년(문종 8) 태자에 책봉되어 1083년에 즉위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질환이 있는 데다가 여막에서 슬퍼한 나머지 쇠약하여져 3개월 만에 죽었다. 시호는 선혜(宣惠)이며, 능은 성릉(成陵)으로 개성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 13代 宣宗1049(문종 3)∼1094(선종 11)> 재위1083~1094
이름은 운(運), 초명은 증(蒸) 또는 기(祈), 자는 계천(繼天). 비(妃)는 이석(李碩)의 딸 사숙태후(思肅太后)이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밝고 제술(製述)에 뛰어나 문종 때 국원후(國原侯)에 봉해졌으며 상서령(尙書令)에 제수된 뒤, 순종 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이 되었는데, 순종이 두달 만에 죽자 그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니 그 환영의식이 성대하였다. 의천은 불경과 경서 1, 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요·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이니 거의 4, 000여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공자의 제자인 顔回 등 72인)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구절이 있어 사람들이 놀라고 안쓰럽게 여겼다. 1094년 2월 열병(閱兵)하고, 5월에 연영전(延英殿)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寺塔)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며, 시호는 사효(思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 14代 獻宗1084(선종 1)∼1097(숙종 2)> 재위 1094~1095.
이름은 욱(昱). 선종의 원자(元子)로 어머니는 사숙태후 이씨(思肅太后李氏)이다. 즉위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모두 처결하였다. 1095년(헌종 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혹은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해 7월에 과연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꾀하였으나, 오히려 주살되고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고 애석해 하였다. 난적(亂賊)을 토벌한 공으로 소태보(邵台輔)는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왕국모(王國#모42)는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가 되었다. 같은해 8월에 계림공 희(鷄林公熙:뒤의 숙종)가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위를 물러난 지 2년 뒤에 죽었다. 시호는 회상(懷觴), 예종 때 공상(恭觴)으로 바꾸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온릉(穩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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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 15代 肅宗1054(문종 8)∼1105(숙종 10) > 재위1095~1105.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天常). 문종의 3남이며 선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비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하여졌는데,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에 즉위하였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고,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이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꾀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태자 '우'가 유조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 16代 睿宗1079(문종 33)∼1122(예종17)> 재위1105~1122.
이름은 우(顒), 자는 세민(世民). 개성 왕씨(開城王氏). 숙종의 장자로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柳氏)이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 9성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이때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인과 무학 17인으로 하며, 명유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니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1122년 4월에 죽자, 태자 해(楷:仁宗)가 즉위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 17代 仁宗1109(예종 4)∼1146(인종 24) 재위 1123~1146.
이름은 해(楷), 초명은 구(構). 자는 인표(仁表). 예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며,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3녀·4녀인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 김예(金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이자겸 등에 의해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1123년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7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척준경을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하여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여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여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함으로써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천도론·금국정벌론·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됨에 따라 묘청의 난이 일어나니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1145년 김부식 등에게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효공(孝恭)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東史綱目.
< 18代 毅宗1127(인종 5)∼1173(명종 3)> 재위1146~1170.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 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林氏)이고, 비는 강릉공 온(江陵公溫)의 딸인 장경왕후(莊敬王后)와 참정(參政)을 지낸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이다. 1134년(인종 12)에 태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그러나 의종은 즉위 때부터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고려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이미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왕권은 더욱 쇠약해졌다.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세력(西京勢力)의 몰락은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을 득세하게 하였다. 서경세력의 몰락은 고려왕실의 유력한 세력기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왕실로서는 왕실의 권위회복과 왕권의 안정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러나 부왕인 인종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難題)를 어린 의종이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의종은 즉위초부터 개경 문신세력의 심한 제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의종은 재위중 거둥이 잦았다. 그 이유를 이제까지 대체로 놀이를 좋아하는 그의 타고난 성격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그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국제관계의 전개도 고려측에 유리하지 않았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인종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대륙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종 때에는 고려왕실의 국내적 지위는 물론 국제적 지위도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의종은 그 타고난 성격이 나약하고 섬세하였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그는 격구(擊毬)와 음률(音律)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뒤에 그가 해결하여야 할 당면과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생각하고, 또 이를 실현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1148년에 현릉(顯陵:太祖陵)과 창릉(昌陵:世祖陵) 등을 참배하였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1158년 백주(白州)에 별궁(別宮)을 창건하여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지은 데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170년에는 서경에 거둥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그는 장차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정하여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하여 고성(古聖)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과 현재 민폐를 구제할 일을 채택하여 신령을 반포한다고 다짐하였다. 그 전에 그 주체적인 내용을 보면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정치에 있어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보면, 의종은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써 나타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재위중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처로 옮겨다니며 놀이로써 시름을 잊거나, 문신들에게 자기과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처하여 있던 시대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의종대의 왕권이 가진 한계성이었다.
무신정변과 왕권양위 의종의 행적을 보면, 그가 재위 중에 유흥과 오락생활에 깊이 빠지고, 또 지나치게 불법을 숭상하고 신지(神祗)를 존신(尊信)하는 등으로 많은 폐단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의종 개인의 방종경박한 성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의종의 행동이 그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던 요인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의종대의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은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초래하였고, 그것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가 되었다.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둥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그의 아우인 익양공 호(翼陽公晧)가 즉위하니, 그가 곧 명종이다. 그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종을 받들어 계림(鷄林:慶州)에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의종은 무신정권이 보낸 장군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韓國史―中世篇―(李丙燾, 乙酉文化社, 1959).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 高麗毅宗代의 活動(河炫綱, 東方學志 26, 1981).
< 19代 明宗1131(인종 9)∼1202(신종 5) > 재위1170~1197.
이름은 호(晧). 초명은 흔(昕), 자는 지단(之旦). 인종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로 강종이 즉위하여 광정태후(光靖太后)라 하였다. 1148년(의종 2)에 익양후(翼陽侯)가 되었다가 1170년에 정중부(鄭仲夫)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하고 나서 곧 수문전(修文殿)에 나아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고(李高)를 대장군·위위경(衛尉卿),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전중감(殿中監)에 임명하는 등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고, 또 문관직과 무관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일파가 바라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실권은 무신에게 돌아갔다. 1171년(명종 1)에 이고가 반란을 도모하므로 그와 그 일당을 주살하였다. 그해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와 경상·진합주도(慶尙晉陜州道)를 각각 2도로 구분하였으며, 왕의 생일을 건흥절(乾興節)로 정하였다. 1173년에 원자(元子) 도(璹:후에 康宗)를 세워 태자를 삼고 56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해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타도와 전왕인 의종의 복위를 위하여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정중부와 이의방 등에 의하여 평정되고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또, 그해 3경(京) · 4대도호부(大都護府) · 8목(牧)으로부터 군(郡) · 현(縣) · 역(驛) · 관(館)에 이르기까지 무인의 등용을 허락했으며, 이때부터 지방관까지도 무신이 장악하게 되었다. 1174년에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에 의하여 좌소 백악산(左蘇白岳山)과 우소 백마산(右蘇白馬山)·북소 기달산(北蘇箕達山)에 연기궁궐(延基宮闕)을 두기로 하고 그 조성관(造成官)을 두었다. 그해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타도를 위하여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윤인첨(尹麟瞻)을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삼아 서경을 치게 하여 2년 만에 평정하였다. 1175년에 영양 등 10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178년에 찰방사(察訪使)를 각 도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지방관들의 근태를 살피게 하였다. 또한, 연등회를 1월 15일에 행하던 것을 옛 제도에 의하여 2월 15일로 환원하였다. 1182년에 패역(悖逆)이 심한 것으로 판단되는 관성현(管城縣:星州)과 부성현(富城縣:瑞山)을 폐지하였다. 1186년에 장군 차약송(車若松) 등 무관 43인을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에 겸속시켰는데, 무신의 겸속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이것으로 무신은 왕의 근시직(近侍職)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해 경상주도와 진합주도를 합쳐 경상주도로 삼았다. 1188년에 양계 병마사와 오도안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순찰하여 지방관들의 청렴과 탐학, 근면과 태만을 살피게 하였다. 1190년에 수태사(守太師)이하 백관 의종(儀從)의 구사(丘史)의 원수(員數)를 정하였다. 1192년에 공사의 연회에 유밀과(油蜜果)의 사용을 금하였는데 그것은 유밀이 귀해졌기 때문이었다. 1195년에 오래 묵은 빚인 숙채(宿債)를 면하게 하여 빚에 시달리는 민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 하였고, 상주에 공검대제(恭儉大堤)를 축조하여 권농에 힘쓰기도 하였다. 1196년에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정치의 쇄신과 중흥을 목표로 하는 내용의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리므로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에게 폐위를 당하고 아우인 평량공(平凉公) 민(旼)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시호는 광효(光孝)이며, 능은 지릉(知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 高麗史節要.
< 20代 神宗 1144(인종 22)∼1204(신종 7) > 재위1197~1204.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 의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명종의 동모제이고,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선정태후(宣靖太后)이다.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198년(신종 1)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민가의 안대(방앗간을 차림.)를 금하였다. 그해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溟州:지금의 江陵)·동경(東京:지금의 慶州), 뒤이어 진주(晉州)·전주·합주(陜州:지금의 陜川)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전주(銓注:人事行政)를 도맡아 행하였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耽羅:지금의 濟州道)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양릉(陽陵)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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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代 熙宗1181(명종 11)∼1237(고종 24) > 재위1204~1211.
이름은 영(韺),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 신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화태후(靖和太后) 김씨(金氏)이며, 비(妃)는 영인후 진(寧仁侯#진27)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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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代 康宗1152(의종 6)∼1213(강종 2) > 재위1212~1213.
이름은 숙(璹) · 초명은 정(貞) · 오(梧), 자는 대화(大華). 명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광정태후 김씨(光靖太后金氏), 비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柳氏)이다. 1171년(명종 1)관례를 올리고, 1173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1197년 부왕과 함께 최충헌(崔忠獻)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갔다가, 1210년(희종 6)에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책봉되었다. 같은해 12월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폐위된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최씨 무단정치로 실권이 없었다. 왕의 생일을 광천절(光天節)이라 정하고, 왕모 의정왕후 김씨(懿靖王后金氏)를 광정태후로 추존하였다. 또한, 원자 진(瞋:뒤의 高宗)을 태자에 책봉하고, 왕비 유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하였다. 시호는 원효(元孝)이며, 장지는 후릉(厚陵:개풍군 현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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