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례문 / 崇禮門 』
<사진 2006년2월27일 촬영 >
맹자의 개혁사상을 접한 유생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와 결의하여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신왕조를 개창하고 태조 3년(1394) 10월 25일에는
한양 천도를 감행합니다.
개성의 지세가 쇠하였다고는 하나 개성 문벌 귀족들과 전 왕조의 지역 속에서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새 궁궐을 조성할 때도 하륜(河崙)은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자 했지만,
오늘날의 백악현무(白岳玄武), 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의 모습으로
궁궐과 도성의 모습을 결정한 것은 '삼봉' 정도전이었습니다.
삼봉이 꿈꾼 것은 불교라는 고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이념!
그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으로서가 아니라 형이하학으로서 도시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답니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습니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쪽 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쪽 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쪽 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쪽 대문에 배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쪽 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쪽 대문은 돈의문(敦義門)이 되고,
남쪽 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쪽 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 자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합니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이 특이한 점은 타 현액이 모두 횡으로 쓰여 있는데,
이 숭례문 현액만 위에서 아래로 써 있는 종액(縱額)이라는 것입니다.
당대의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과천에서 내왕할 때면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우뚝 선 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종액(縱額) 현판 글씨,
그 글씨 일설에는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은 귀한 백성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하여 세워 달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남방 화(火)에 해당되는 글씨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그것은 한강 건너 남쪽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관악의 화기가 서울 도성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째거나 숭례문은 자신이 불길에 휩싸임이 없이 기적적으로, 600여 년의 성상을 견디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목조였고
나머지는 모두 임란 이후에 재건된 것입니다.
1962년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3개의 대들보가 발견되어 그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남대문은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후 12일 뒤인 태조 5년 10월 6일에 상량하고,
그 2년 후인 1398년 2월 8일에 준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대문 자체가 도성의 연속된 성로(城路) 위에 지은 것인데
이 도성을 짓기 위하여 지반을 돋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문제가 발생하여 세종조에 영의정 황희(黃喜) 이하 여러 대신이 건의하여
근본적으로 남대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세종 30년(1448) 3월 17일 상량하였고 5월에 준공하였습니다.
그 뒤 성종 10년(1478)에 한 번 더 개축한 사실이 대들보로 확인됩니다.
남대문은 이상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화를 면했습니다.
경복궁이 임란으로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하여
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3년 동안을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공궐(空闕)로 남아 있었던 사실에 비한다면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혼이요 얼굴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서울이 다 터져 있어 도성팔문의 의미를 망각했지만,
과거에는 저녁 10시경 인정(人定)에 8문을 다 닫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통금 제도가 정확히 유지된 성곽 도시,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고
여기를 통과치 않고서는 한성 진입이 불가능했습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1906년 황태자(훗날 大正天皇)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남대문을 통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대문을 분쇄해 버리겠다고 제의했답니다.
이에 민중의 여론이 들끓자 그들은 융희 원년(1907) 남대문에 연결된 북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었고
이듬해에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을 헐어 달랑 남대문만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왜놈들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도
우리 민족은 이 남대문 주변에서치열한 항쟁을 벌였는데,
일본군은 남대문 성벽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쏘아댔습니다.
상인, 노동자, 남녀 학생, 부녀자들까지 용감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피를 흘리며 압제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6·25전쟁 통에도 광화문은 무참히 파손되었지만 남대문만은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억센 운명을 타고난 우리 민족의 600년 유물, 국보 1호,
그 숭례문이 덧없이 하룻밤 사이의 회록지재로 사라진 것입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민족의 구원한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2년 후에 남대문을 신축하여 오가는 백성들에게 위용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지금의 정치인은 국민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
지금의 나태한 행정이
610년을 굳건히 그 자리에서 우리네 삶을, 애환을 지켜주던 '숭례문'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 우리의 자존을 한순간에 우리의 시아에서 앗아갔습니다.
참으로 어쩌구니 없는 일입니다.
5 시간은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랍니다.
불은 10일 오후 8시40~50분쯤 났답니다.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쯤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습니다.
610년의 무궁한 세월을 지닌채...
아, 崇 禮 門 !
백성을 그리 사랑한 임금의 그 높은 禮는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
'그냥 > 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은 청년 박정희 > (0) | 2008.02.28 |
---|---|
[스크랩] 국민교육헌장 (0) | 2008.02.26 |
당시(唐詩) (0) | 2007.11.04 |
故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 (0) | 2007.06.22 |
선사 및 삼국시대 무덤 방식 (0) | 2007.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