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

「伽 倻의 歷史」

鄕香 2007. 5. 30. 12:33

가야(伽耶)는 서기 300년 무렵에 三韓 중 弁韓이 모태가 되어 성립된 세력집단으로 가야(伽倻).가라(加羅.加良).가락(駕洛).임나(任那)등으로 표기되었던 고대국가로 형성하지 못하고 소국들의 연맹 형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야연맹체 또는 연맹왕국 "가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가야는 前期와 後期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전기는 김해지역의 구야국(狗耶國.金冠國)을 중심으로한 가야연맹을, 후기는 금관국이 신라의 영향권 내로 편입됨에 따라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의미합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경상도 해안지역의 여러 집단들도 일정한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어 소국(小國)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이들은 변한(弁韓)으로 총칭되었던 구야국(狗耶國)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연맹관계는 백제국(伯濟國)을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나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간 신라에 비하면 지극히 느슨한 것이 었고 이것은 상당부분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 경제적 조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기 가야연맹의 분포 범위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에 국한되며, 내륙지역에는 아직 가야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지역은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왜를 잇는 해상교역의 중개지로 활발한 교역을 통해 富를 축적하고 다양한 문화를 섭취함으로써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야는 대외적으로 신라 · 백제 · 왜 등의 이웃 집권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원적이고도 완만한 연맹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성 · 사천 · 마산 · 동래 등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서 김해에 못지않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국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면모를 반영합니다. 

이와같은 정치적 · 문화적 특징으로 전기 가야연맹은 집권적 통합력을 진전시켜간 이웃 신라 · 백제 등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빨리 대처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4세기에 이르러 교역상대국이자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면서 주변의 세력판도가 일변하자, 이러한 가야의 취약성은 현실적인 문제로 나타났습니다. 고구려는 반도에서의 경쟁국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 후원했고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여 바다 건너 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인 가야지역을 잠식해 갔습니다. 

백제는 왜(倭)와 연결하여 이를 견제하면서 역시 가야지역에 親백제세력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로 인해 가야연맹의 여러 소국은 다시 친신라세력과 친백제세력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야 중심지역이 친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卓淳國:지금의 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서부의 여러 세력은 친백제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가야지역 백제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征討)가 진행되면서 가야의 여러 세력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가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서서히 낙동강 서안의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내륙지역은 전화(戰禍)를 거의 입지 않았고 해안지역의 선진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령지역의 반파국(伴跛國)은 집권적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가야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습니다. 흔히 이를 후기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연맹이라 부릅니다.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진전된 통합력을 발휘하였으며, 이를 발판으로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 · 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6세기초에는 백제와의 국경지역인 기문(己汶: 지금의 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왜와의 교역중심지인 대사(帶沙 : 지금의 하동)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 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기 가야연맹을 구성한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완전 복속되어 562년(진흥왕 23)에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소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