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10년)~1856(철종 7년)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이주(毗柱)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노경(魯敬)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준주(駿柱)의 딸이다. 장남이었던 김정희는 대사헌인 큰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1809년(순조 9)에 생원이 되었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대교·충청우도암행어사와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지냈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서예에서도 조선 후기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상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세인의 극찬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연경에서 옹방강 등의 대가와 접촉하고 수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글씨에 대한 안목은 더욱 향상되었다. 국내의 서도에 대해 "구서(舊書)의 어떠한 것도 모르고 그 후에 자기류의 서법으로 널리 자랑하며 가(家)마다 진체(晉體)요, 호(戶)마다 왕희지(王羲之)라"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원래 명(明)의 동기창(董基昌)의 서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행(燕行) 후 농후하고 기골이 강한 옹방강의 서체를 본받게 되었다. 이후 옹방강이 숭상하는 송의 소식(蘇軾)과 미불(米)의 서체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해서(楷書)의 모범이 되었던 당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까지 익혔다. 더 올라가 한예(漢隷)의 서체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이를 숙달하는 데 심혈을 쏟았다. "흉중(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隷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낼 수 없다"고 하여 예서를 서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의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박규수(朴珪壽)는 추사체의 독특함에 대해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처럼 보인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서론 書論〉에서도 완원의 설을 받아들여, 〈서파변 書派辨〉을 통해 법첩(法帖)·묵·붓·종이 및 선인들의 서체와 금석비문에 대해 논하고 있다.
시도(詩道)에서도 〈시선제가총론 詩選諸家總論〉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하며,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두보(杜甫)에 이르는 관심의 폭을 보여준다.
김정희는 고증학의 경향에 따라 시·서·화 일치의 동일묘경(同一妙境)을 항상 주장했는데, 화풍(畵風) 역시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따랐다. 특히 난법(蘭法)은 예(隷)에 가깝다고 보고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밖에 대나무와 산수(山水)를 표현하는 데 고담하고 아름다운 필선(筆線)을 사용하여 고상한 기품을 드러냈다. 현존하는 작품 중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와 〈모질도 耄耋圖〉·〈부작란 不作蘭〉 등이 유명하다.
<眞學問浚五倫起 . 大文章自六經來>
추사 김정희 먹글씨(秋史金正喜筆行書)
조선시대1812년/ (軸)비단에 먹글씨(絹本墨書)127×28.6cm/국립중앙박물관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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