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옛 인물초상화

송시열 초상(宋時烈肖像)

鄕香 2007. 5. 8. 18:56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쓴 이 작품은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주름 및 수염에 보이는 섬세한 얼굴 표현과 사실적인 묘사력이 두드러지며, 옷주름은 고른 선으로 간략히 나타냈습니다.

얼굴과 복식에서 음영 처리가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은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면에 쓰인 글은 정조(正祖)의 어제로 무술년(1778)에 쓴 것입니다.

17세기 화풍을 보여주고 있으나 정조 연간에 원본에 충실하게 옮겨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제작 시기에 논란이 있습니다.  

 

 

 

송시열 초상(宋時烈肖像)

조선(朝鮮) / 絹 89.7×676cm / (국보239호)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철면피(鐵面皮)가 아니라면 얼굴은 정직하다. 표정은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전한다. 옛사람의 말이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에 묻고, 사람의 이력은 얼굴에 물어라"고 했다. 얼굴이 그 사람의 자사전인 셈이다. '눈썹 끝이 말려들면 다복(多福), 팔자 주름이 입어귀로 가면 아사(餓死), 하는 따위의 속설까지 믿는 것은 섣부르지만, 얼굴로 생애를 가듬해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초상이다. 이토록 극적인 인상을 찾기란 싶지 않다. 얼굴에 산맥이 보인다. 이마를 가르는 주름은 첩첩 연봉이고, 눈썹과 광대뼈에 비킨 주름은 골 깊은 험산이다. 10년이 채 안 되는 벼슬살이에 나라 정사를 쥐락펴락했던 우암이다. 낙향과 등용과 유배를 거듭하다 사약을 마신 삶에서 무슨 평탄한 흔적을 찾겠는가, 응시하는 눈초리가 냉랭하고 눈머리와 눈초리는 불그레하다. 저 눈빛으로 "임금이 발라야 나라가 바르다'고 외쳤다. <宋子>라는 존칭으로 聖人의 반열에 오르고도 강고한 성격 때문에 비난을 받은 그는 불화를 구태여 조정하려 들지 않았다. 납덩이 같은 외고집이었다. 우암은 관복을 입은 초상화가 없다. 모두 유학자의 옷차림인 深衣바람이다. 비단옷을 멀리한 그의 성품이 개결했다. 이 그림은 문인(門人)이자 후학(後學)인 김창업이 그렸다 얼굴은 마음을 닮는다. 우암 얼굴에 생애의 풍상(風霜)이 완연하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우암 송시열 초상

조선시대(1680년) / 김창업 作 / 絹本彩色 91×62cm / 충북 제천 황강영당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