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耶)/아라가야(阿羅伽耶)

「함안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유적/咸安末伊山阿羅伽耶古墳遺蹟」

鄕香 2024. 10. 28. 17:01

현재의 말이산 고분군의 全景寫眞를 찍고자 서울역에서 19시25분發 진주행 itx 열차를 타고 함안역에 내리니 子正 07분이다. 함안역 인근에 여관이라도 있겠지 생각했는데 咸安驛舍 바깥을 나와보니 허허벌판 가운데 역사만 덩그러니 있고 저 멀리 작은 마을에 전열등 같은 불빛 몇만 어둠을 이겨 내려고 깜박이고 있다. 조그만 저 마을에 여관이 있을까? 있다한들 이 한밤중에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발바닥은 아픈데 할 수 없이 역사로 되들어가 냉기만 감도는 플랫폼 대기실 걸상에서 새벽 6시가 되도록 6시간동안 어둠속에서 냉기와 친숙하기를 애쓴 밤, - 07시가 되어 함안읍내를 찾아갈 양으로 역사를 나서니 오 하느님의 은혜로움인가! 마침 택시 1대가 客을 기다리고 있어 구름 흐르듯 말이산에 이르렀다.   

 

〔아라가야의 고지 함안/阿羅伽耶而故地咸安〕

함안은 《三國遺事》에 전하는 阿羅伽耶(《三國史記》의 阿耶國)의 故地이다. 

경남 西南部의 유력한 세력으로서 金海의 金官國, 高靈의 大伽耶國에 맞먹는 힘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任那加羅를 이 함안의 아라가야로 보는 說도 있다. 《日本書記》에도 이러한 아라가야의 영향력을 시사해주는 내용이 보인다. 지금의 함안군 伽耶邑內에 있는 많은 古塚古墳(末山里, 道頂里 古墳群 등)들은 당시 융성했던 아라가야의 雄?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이들 고분군의 주변에는 城山城, 蓬山城과 같은 산성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들 지역에 정식 발굴조사가 부진하여 지금으로서는 복발주伏鉢胄,찰갑札甲,마구馬具,도검刀劍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된 咸安 未山里 34號墳을 통해 그 당시 아라가야세력의 단면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가야고분군/伽耶古墳群〉

경남 김해와 경북 고령 등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는 고대 가야고분유적 7곳을 묶은 '가야고분군(Gaya Tumuli)은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 가 인정된다."고 높이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섰다. 

 

〈철의 왕국 가야/鐵의 王國 伽耶〉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룬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다.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경북 고령의 대가야 등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나의 단일 국가가 아니라 20개 이상의 여러 국가로 나뉜 때문에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대가야는 철(쇠)을 바탕으로 경남 서남부와 호남 동부 일대를 아우르는 제법 큰 세력을 이뤘다. 그러나 가야를 정복한 신라가 사료를 없애 당시 모습을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가야의 역사는 무덤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가야고분군/ 伽耶古墳群〉 

가야고분군은 1~6세기 중엽에 걸쳐 영남과 호남 지역에 존재했던 고분군 7곳을 하나로 묶은 연속유산이다. 경북 고령 지산동, 경남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령 교동과 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으로 구성된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5곳, 경북 1곳, 전북 1곳이다. 이들 고분군은 한마디로 가야의 역사와 문명 문화를 보여주는 '타임캡슐'이다. 특히 구릉 능선을 따라, 혹은 나지막한 언덕에 조성된 무덤들은 각종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 가야의 면면을 보여주는 보물창고라 하겠다. 

 

 

〈옛 가야의 구성 〉

 

〈함안박물관 / 咸安博物館〉 

 

 

《삼국유사》 〈기이편〉 '5가야조'에는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혹은 아나가야(阿那加耶),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등 다양한 이칭으로 전하지만 음운상 모두 비슷하다. 원래 변한 12국의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군에 비정된다.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沙內里) 널무덤군[土壙墓群]은 아라가야 초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아라가야는 4세기 말경까지 구야국(狗邪國:金官加耶)과 함께 전기 가야연맹의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5세기 초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체되고 후기 가야연맹이 고령지역의 대가야(大加耶)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는데, 아라가야는 후기 가야연맹체의 구성원이 되어 남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다. 522년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고, 신라는 529년 탁기탄(啄己呑:경남 밀양)을 멸망시키자 가야 남부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대가야를 불신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때 아라가야는 백제 · 신라 · 왜(倭)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

 

그 후 가야 남부의 諸國은 신라와 백제의 영향권에 각각 편입되어 분열되어 갔는데, 남동부지역의 가야국들이 신라에 병합된 반면 아라가야를 비롯한 남서부지역의 가야국들은 자립성을 보유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다. 그리하여 아라가야는 540년대에 가야 남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여 외교적으로 신라 · 백제와 접촉하면서 독립과 안전보장을 추구하였으나 백제의 간섭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에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경 고구려 · 백제간의 독산성(獨山城:충남 예산) 전투를 유발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함으로써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은 다시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전락하였다. 그 뒤 신라가 550년대 전반 한강유역 쟁투에서 백제를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자, 아라가야는 559년경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 되었다.

 

현재 함안 일대에는 말산리(末山里) 대형고분군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 시기 아라가야의 세력 정도를 보여 준다. 

 

〈박물관 옆 말이산고분군(末伊山古墳群)입구 정경〉

 

동이 트자 고분군에 금빛 물이 든다. 

 

 

두 번째 봉분 앞 나무 한그루 가을 아침 햇살에 물이 드니 그 쓸쓸함 가슴에 스며 든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 다른 가지능선에 봉분이 줄을 섰다. 그 아래 건물은 말이산고분전시관이다.

 

 

유려한 말이산 주능선에 봉긋봉긋 봉우리들 점을 찍는다.

 

 

〈1號 古墳 옆 산책길가에 세워진 세계유산標石의 銘文〉  

☆대성동 고분군(大成洞 古墳群) 

☆말이산 고분군(末伊山 古墳群)

☆옥전 고분군(玉田 古墳群)

☆지산동고분군(池山洞 古墳群)

☆송학동 고분군(松鶴洞 古墳群)

☆유곡리·두락리 고분군(酉谷里·斗洛里 古墳群)

☆교동·송현동 고분군(校洞·松峴洞 古墳群) 

유네스코로부터 7곳의 고분군들이 동질성 문화로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 咸安 末伊山古墳群〉 사적 제 515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무리지어 조성되어 있는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적이다. 말이산末伊山은 "머리+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의 산'을 의미하는데, 이로 보아 말이산의 어원語原이 아라가야의 왕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산은 함안의 가야분지에 위치한 해발 40~70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북으로 약2km정도 뻗은 중심능선과 이로부터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가지능선으로 되어 있다. 

고분군은 구릉의 중심과 가지능선에 열을 지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정경이 마치 고대 허리띠에 주렁주렁 달아서 느린 들이개를 연상시킨다. 

 

 

〈말이산 6호분/末伊山 6號墳〉

6호분과 말이산 능선의 情景.

 

 

저 고운 곡선은 이름도 아름다운 아라가야의 여인들에 심성을 보는 듯하다. 

 

 

말이산고분군의 면적은 52만㎡로 단일 고분유적으로서는 국내 최대급이다. 말이산 구릉의 주능선과 서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가지능선의 꼭대기에는 대형의 봉토분이, 경사면에는 중소형의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그중 대형의 봉토분은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중반 ~ 6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1~37호분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정밀지표조사 결과 이들 봉토분을 포함해서 약 1,000기 이상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물관 옆 제3가지능선 위에 3개의 古墳이 縱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으로 음영을 피하기 위해 해를 등지고 서쪽을 향해 담은 정경이다. )

 

 

약 2km 정도 남북으로 뻗은 주능선에서 서쪽으로 뻗은 8개의 가지능선 중 가운데에 위치한 제3가지능선의 모습으로 중간 크기의 고분들이 능선 따라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말이산 57호분 · 128호분〉

2018년 발굴조사된 57호분 · 128호분은 무덤방 길이 6m정도의 중형급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다. 무덤 내부에서는 말이산 돌덧널무덤의 특징인 들보시설이 뚜렷하게 확인되었으며, 특히 57호분에서는 북쪽으로 별도의 유물부장구덩이 1기가 딸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물 부장 구덩이는 말이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조로 말이산고분군의 다양한 매장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금입사고리자루칼/金入絲環頭大刀) 

함안 말이산57호무덤(咸安 末伊山 128號墳) 5세기(5世紀)   길이(長 89.7cm,) 너비(幅 4.0cm) 

 

 

〈57호분 유물 부장 구덩이 / 57號墳 古墳 遺物副葬槨〉 

57호 봉분 밖 유물 부장 공간은 무덤의 주인이 없고 유물만을 부장하기 위한 공간으로 57호분 봉분 경계보다 바깥에 만든 특이한 사례에 해당한다. 평면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규모는 길이290cm, 너비119cm, 깊이36cm이다. 구덩이 내부에는 4벽면을 따라 뒤채움 흙(보강토)이 돌려져 있고 바닥은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다. 유물은 바리모양 그릇받침 3점, 뚜껑이 있는 굽다리 접시 8세트 16점, 항아리類 9점 등 모두 28점이 출토되었다. 뒤채움 흙과 유물양상으로 볼 때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부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 부장 구덩이는 말이산 고분군의 다양한 매장풍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주능선의 북쪽 정경으로 끝머리 높은 자리에 2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능선 북쪽 정경으로 우측에 4호고분 좀 뒤 좌측 봉우리 위에 2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음이 보이는데 그 너머 낮은 능선에도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박물관이 보이는데 필자가 이곳 주능선으로 오른 시발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12호분.

 

 

〈13호분/13號墳〉

말이산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호분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창원대학교박물관, 경남연구원 등 여러 기관에 의해 수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말이산고분군은 널무덤(木棺墓)서 대형의 덧널무덤(木槨墓)으로 교체되고 아라가야 전성기인 5~6세기에는 돌덧널무덤(石槨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을 중심 구조로하는 대형봉분이 밀집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13號墳에서 남쪽을 바라본 정경이다 마을 건너에도 고분이 보인다. 

 

 

〈6호분/6號墳〉.  

2005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높은 본분이 있는 구멍식돌덧널무덤으로 말이산 내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 

발굴조사 전 수차례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둥근고리 큰칼, 창, 화살촉, 투구 등의 무기류와 말투구, 말갑옷 등의 말갖춤새와 다양한 그릇받침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canon camera  photographie)

 

(Galaxy N0te 20  photographie )

 

함안박물관에서 주능선 중간으로 올라와 남쪽 13호분 앞에서 중심능선 북쪽 끝 4,5호고분을 바라본 정경. 

리듬같은 산능선에 봉긋봉긋 봉우리들 홍진에 찌든 마음을 정갈하고 유려하게 다듬어 주네.  

 

 

13호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가야분지에 위치한 구릉선 산지인 말이산은 중심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그로부터 서쪽으로 8개의 가지능선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대형의 고분은 모두 중심능선과 가지능선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의 위치는 제 4가지능선의 북쪽의 삼기마을을 통해 중심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중심능선을 만나 남쪽으로 조금 더 올라온 13호분이다. 

 

 

13호분에서 서쪽을 내려다본 정경이다. 雨期에 소실된 봉분을 복구하고 있다.

 

  

〈말이산 13호분 / 末伊山 13號墳 정면〉 

13호분은 봉토지름 40.9m 높이8.1m에 달하는 말이산고분군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1918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약탈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100년 후인 2018년 재조사를 실사하였다.

조사결과 가야 최초로 별자리 덮개돌과 무덤방 내부 4벽면이 붉게 채색된 대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임이 확인되었다. 별자리 덮개돌은 아라가야의 내세관이 반영된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말갑옷을 비롯한 말갖춤새, 꾸미개, 철제 무기류, 토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아라가야의 수준 높은 문화와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말이산고분군은 수준 높은 고대문화를 간직한 채 한반도의 주요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13호분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석) 

별자리 덮개돌은 총14개의 무덤방 덮개돌 중 남쪽에서부터 5번째에 위치하고 재질은 안산암재로 추정한다. 규모는 길이 230cm, 너비 53~78cm, 두깨25cm이다. 덮개돌에서 발견된 각조된 별홈은 모두134개로 전면에 고르게 본포하고 있으며 다양한 크기로 새겨져 있다. 그간의 연구에서 별홈의 일부가 여름철 고대 별자리를 표현한 것임이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별자리는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 기수(箕宿), 두수(斗宿) 등이 있으며 이들은 현대 별자리로 은하수 주변에 있는 전갈자리와 궁수자리에 해당한다. 무덤 천장에 별자리를 표현한 예는 고구려 고분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가야무덤에서 별자리가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았던 가야인들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13호분 앞에서 뻗어내린 가지능선의 정경이다.〉

앞에 발굴된 유물안내판을 세운 봉분 상부가 민밋한 고분은 86호분이고 그 아래 좌측은 129호분이다. 

 

《129호분/129號墳》

무덤방의 규모는 길이 5.1m 너비1.2m 높이1.1m 정도이다. 뚜컹돌은 6매가 남아 있었으나 무덤방의 크기로 볼 때 8매 정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방의 경사면 상부에는 1.6~2.5m의 너비로 굴착한 반달모양의 주구를 조성하였다. 조사당시 129호분의 봉분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도량의 법식과 전문가 자문을 바탕으로 봉분을 복원하였다. 129호분은 도굴의 피해로 돌덧널이 상당부분 파괴되었으나 내부의 유물은 항아리, 뿔잔, 굽다리접시, 컵모양토기 등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129호분의 축조시기는 5세기후반으로 추정된다. 

*주구周溝 : 무덤을 만들기 위한 흙 채취로 주변 배수로를 겸한 무덤 주위에 두른 도랑 또는 구덩이 * 

 

 

〈86호분/86號墳〉 

86호분은 봉분 상부가 대부분 깎여나가 평평하게 되었고 도굴로 인하여 무덤방 벽면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뚜껑돌은 도굴로 대부분 유실되고 5매만 무덤방 내부로 함몰되어 남아 있었다. 무덤방의 규모는 길이 6.5m, 너비 1.5m, 높이 1.9m 정도이고, 무덤방 내부 벽면에 들보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유물은 뚜껑, 굽다리접시, 컵모양토기, 항아리, 그릇받침의 토기류와 화살촉, 금동제 화살통 부품, 금동 은제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고분에서 출토된 불꽃무늬를 투각透刻한 굽다리 접시(高杯)가 잘 알려져 있다. 

 

(굽다리접시/高杯)

함안(咸安 10號墳) 높이(高19.1cm), 입지름(口徑18.9cm)

 

〈86호분/86號墳〉  

 

〈86호분 / 86號墳〉 

86호분은 13호분과 인접하고, 금동제와 은제의 말갖춤 등 출토유물을 통해 13호분을 볼 때 13호 무덤 주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86호분의 축조시기는 말이산 13호분과 동시기인 5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들보시설 : 무덤방 덮개돌의 약한 강도를 보완하기 위해 무덤방 내부에 설치한 목가구木架構시설. 아라가야의 독창적인 고분축조기술로 평가됨. (한옥 지붕 밑 대들보 역할로 생각하면 된다.) 

 

 

13호고분 좌측 남쪽 골짜기 건너 봉우리에 위치한 고분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13호분 건너 봉우리에 위치한 고분의 정경으로 번호를 확인할 수 없었다.

 

 

無號墳을 내려와 뒤돌아본 정경이다.

 

 

말이산중심능선의 9-10호분으로 가는 중 바라본 정경 

 

 

〈말이산 9·10호분/末伊山 9·10號墳〉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말이산 주능선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9호분과 10호분은 말이산 고분군 내에서도 매우 상징성을 가진 고분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함안박물관에서 중심능선으로 올라오던 제3가지능선과 고분의 모습이다. 앞 고분은 57호분과 128호분이다. 

 

 

〈말이산 4호분/末伊山4號墳〉

 

〈 말이산 4호분/末伊山 4號墳〉

말이산 4호분은 1917년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現 서울대학교) 이마니시 류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봉분 규모는 가야고분 중 최대급으로 말이산 고분군의 독창적인 고분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들보시설과 수레바퀴모양토기, 오리모양토기, 사슴뿔장식칼집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수레바퀴모양토기/車輪飾土器)

함안 말이산4호무덤(咸安 末伊山 4號墳) 5세기(5世紀) 높이(高14.0cm) 너비(幅20.0cm)

 

〈 말이산 4호분/末伊山 4號墳〉

 

4호분을 지나 주능선 북쪽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2호분과 3호분을 향해서 4호분을 우측에 두고 발길을 옮긴다. 

 

 

 

2 · 3호분으로 오르는 우측 자락 밑으로 군청과 함안군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2호분과 3호분 북쪽 낮은 봉우리에도 고분 두엇이 자리하고 있다. 

 

 

함안 시가지 정경

 

2 · 3호분으로 오르는 둔덕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말이산 고분군의 情景이다. 중심능선 약2km에 걸쳐 큰 봉분들이 주능선 따라 자리하고 서쪽으로 8가지능선을 뻗어 내려주었고 그 가지능선에도 고분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함안 도정리 · 미산리유적 전경/咸安 道頂里·未山里遺蹟 全景〉

 

〈말이산 2,3호분 / 末伊山2,3號墳〉

북쪽 가장 높은 위치에 나란히 자리한 2호고분과 3호고분은 산을 壇처럼 깎아 조성한 그 위에 봉분 둘을 봉긋 올렸다.

 

아침 햇살 발그레 번질 무렵의 정경, 

 

한낮이 기울 즈음의 情景

 

 

〈말이산 2 · 3호분/末伊山 2 · 3號墳〉 

말이산 주능선 북쪽 능선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2호분과 3호분은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아 유적의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봉토분의 위치와 주변 유적의 조사성과를 통해 볼 때 5세기경 축조된 봉분을 가진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末伊山 2, 3號墳〉

 

 

말이산 북쪽 2 · 3호분에서 다시 4호분을 바라보고 주능선으로 향한다. 

 

 

2,3호분에서 북쪽 정경.

 

 

유려한 곡선으로 뻗어간 주능선에 봉긋봉긋 봉우리들 홍진에 찌든 마음을 정갈하게 보듬어 주네  

남쪽 2,3호분에서 북으로 이어진 주능선의 큰 봉분들 모습과 끝머리에서 떨어진 외봉우리와 가지능선의 봉분들, 어쩜, 이리 수천년이 지나도록 오손도손 도탑고 정겨울까!

 

 

이제 歸京에 들어설 시간이다 중심능선으로 오르던 이 자리에서 박물관으로 내려간다.

 

 

말이산 6호분(末伊山 6號墳) 

2005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높은 봉분이 있는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말이산 내에서도 최대급에 속한다. 발굴조사 전 수차례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둥근고리큰칼, 창, 화살촉, 투구 등의 무기류와 말투구, 말갑옷 등 말갖춤새, 다양한 그릇받침과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심능선을 뒤로 하고 6호분 앞에서 인증 한 장 -

 

 

함안박물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말이산 古墳群

 

 

함안박물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말이산 古墳群

 

 

〈함안박물관/咸安博物館〉

 

 

〈함안역사/咸安驛舍〉

 

〈함안역 승강장/ 咸安驛乘降場〉

 

2024년10월25일 咸安에서  - 明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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