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유물( 遺物)

중국 청대벼루(中國 淸代 硯) 2

鄕香 2009. 7. 10. 00:21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연재변증설(硯材辨證說)과 고와징니이연 변증설(古瓦澄泥二 辨證說)에 중국의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벼루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벼루(硯)는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어 사용하였음을 입증합니다. 문방사우(文房四友)는 문방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필묵연의 필기구를 말합니다. 이 네가지는 서로 떨어져 사용될 수 없는 벗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 용어는 唐의 한유(韓愈)가 붓을 의인화한 모영전《毛潁傳 》에서 " 영(붓)은 강현 사람 진현(먹)과 홍농사람 도홍(벼루)및 회계의 저선생(종이)과는 우애가 깊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후에 「 문방사우」라는말의 출처가 된 것으로 봅니다. 도홍은 벼루를 의인화 한 것으로서 도제(陶製)의 벼루는 硯池가 깊고 그 모양이 凹 형을 이루어 도홍이라 하였답니다. 宋나라 사람 소이간(蘇易簡)은 문방사보(文房四譜)에서 '지필묵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이들이 문방사후에 봉해진 내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이에 해서, '저지백의 자는 수현이며 화음 출신으로 호치후에 봉해졌다."<楮知白 字守玄 華陰人也 封好치(田+寺)侯>."라 하였습니다. 중국의 국어사전에는 호치후의 치(田+寺)음과 지(紙)는 음이 비슷하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붓은, " 모원예이며 자는 문봉, 의성 출신으로 관성후에 봉해졌다. (毛元銳字文鋒, 宜城人也, 封管城侯)" 고 하며, 그 출처로서 한유의 ,모영전>을 인용하였답니다. 먹에 관해서는, " 이현광의 자는 처해, 연나라 출신이다. 의성의 모원예(붓)와 화음의 저지백(종이)과 더불어 몸에 배게 힘들여 배워 문장을 이룬다. 천자는 선비를 중히 여기어 송자후에 봉하였다.<易玄光字處해(日+每), 燕人也, 宜城毛元銳, 華陰楮知白爲文章濡梁之友, 天子重儒, 封松滋侯>."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벼루는 별칭을 석허중이라 하는바 이에 관해서는 " 석허중의 자는 거묵이며, 남월인이다, 즉묵후에 배수하였다, 관성 모원예와 연인 이현광, 화음 저지백과는 출처가 같다. <石虛中, 字居默, 南越人, 拜卽墨侯, 與宜城毛元銳, 燕人易玄光, 華陰楮知白同出處>.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방형의 네 면을 繩簾을 고리로 연결하여 두르고 全面을 연당(연홍)으로 구성하고 그 硯堂 윗면 가운데 고리에 人面을 만들어 고리에 걸었는데, 몸통 부분은 원으로 문살문을 두르고 그 안을 파내어 墨池를 만들고, 양 어깨 부분에 각각 연잎을 팔이나 날개인 양 표현하고 아랫부분에는 연줄기로 꼬리인 양 표현하여 마치 명경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결승문벼루(結繩文硯)

中國 淸代/ 15.9×10.4높이 2.0cm / 유치웅 所藏

 

 

朱丹빛 도는 硯石의 자연무늬를 살려 단순하게 만든 표준형벼루입니다. 단조롭지만 세로의 두 면을 동글려 부드러운 느낌과 담박함이 좋습니다.  

 화날벼루(火捺硯)

中國 淸代/ 17.2×10.9 높이 2.3cm / 권도홍 所藏

 

 

물결문과 구름무늬를 두고 그 가운데에 깊은 硯池를 두고 그 아래 장방형의 硯泓을 마련한 전형적인 벼루입니다.

  운문벼루(雲文硯) 中國 淸代/ 17.9×11.4 높이 2.9cm / 이효우所藏

 

 

간결하고 사실적인 파초무늬가 西域風이면서도 단조롭고도 참신함이 있습니다.

 

 파초문민패벼루(芭蕉文板硯)

中國 淸代/ 18.1×11.9 높이 2.2cm / 권도홍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