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석파 이하응 필 석란도대련(石破李昰應筆石蘭圖對聯)

鄕香 2008. 8. 10. 00:37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보다 잘 알려진 석파(石破) 이하응(李昰應1820∼1898), 은 구한말의 격동기에 파란 많은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적 이력 못지않게 묵란화(墨蘭畵)의 일인자로도 널리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삶의 격정들을 토로해내듯 묵란화에 몰두하여 석파란(石破蘭)이라는 독창적인 난 그림을 형성하였습니다.

이하응의 묵란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서예적 필묵법에 기초하고 있으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고도의 필력과 문기(文氣)가 함축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난잎을 그릴 때 세 번의 굴곡을 주는 삼전법(三轉法)과 활달하고 예리하게 끝나는 서미(鼠尾)의 선묘가 특징입니다.

묵란과 함께 어우러진 괴석도 눈여겨 볼 만한데, 그의 묵란에 괴석이 등장하는 것은 60세 이후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만년(晩年)의 작품으로 갈수록 괴석의 비중이 커지고 형태도 다양화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이하응이 68세되던 해(1887년)에 그린 것으로 시서화(詩書畵) 일치의 격조를 갖춘 석파 묵란도 중의 수작(秀作)이라 할 만합니다. 이처럼 이하응의 묵란화는 구도와 필묵법 등에서 독특한 화풍을 창출하여 중국의 난 그림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조선적인 묵란화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화면에 쓴 제시(題詩)에는 묵란에서 느낄 수 있는 흥취와 묵란을 그리는 노년(老年)의 심경을 표현하였습니다.

題詩는 다음과 같습니다.

 

畵譜有怒蘭喜竹之句  화보에 노란(怒蘭)과 희죽(喜竹)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何謂而書耶  무엇을 두고 쓴 말인가?
余則曰不然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凡畵必引興而作  무릇 그림은 반드시 흥취를 끌어와서 그려야 하는데
興者須與喜一般  흥이란 모름지기 기쁨과  같은 것이다.
現吾寫蘭四十年  지금 내가 난을 그린지 사십년이 되었는데
每引意輸情    늘 의중을 끌어와서 (정을) 그림에 투영시켰다.
況今韻人所求   하물며 요사이 시인들이 구하는 것은
豈可不以和意寫之也  어찌 의중(意中)에 화합(和合)하는 것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但年老筆拙畵不入極者多  나이 들어 운필이 졸렬해져 그린 것이 극치에 들어가지 못 한 것이 많다.
是愧是悚  이것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이다.

 

 

 

 

 

석란도대련(石蘭圖對聯)

韓國 朝鮮 1887年 / 絹本水墨151.5cm×40.8cm / 湖林博物館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