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 경주부윤 조기복 묘비 (추사 김정희의 隸書)」

鄕香 2022. 12. 2. 20:56

파주시 광탄면 고려시대 국립숙박시설이었던 혜음원址를 찾아 보기위해 버스에서 내려 길 들어섰는데 혜음원지 방문자센터 마당 맞은편 우측 산자락에 "추사 김정희 친필 조기복 묘표"라고 쓴 자줏빛 관광 고적 알림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걸 어찌 그냥 지나치랴 기꺼이 발길을 옮겨 산자락으로 들어섰다. 묘 주인공보다 추사의 글씨로 인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조기복(趙基復 : 英祖49年(1773년)~憲宗5年(1839년)은 本貫은 林川, 字는 백초(伯初)이며 조선 후기 문신이다.

10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가문으로 刑曹判書를 지낸 高祖 효정공(孝貞公)오재(寤齋) 趙正萬, 水原都護府使를 歷任한 曾祖 趙明奎, 郡守를 지낸 祖父 趙德浩, 通德郞을 역임하고 司僕寺正에 追贈된 할아버지(生父의 父)趙德洞,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趙學勛(勳), 생부는 通訓大夫 南原鎭營兵馬節制都尉, 瑞興大都護府使를 歷任한 趙學春이다. 어머니는 洗馬(正九品)를 지낸 宋煥星의 딸, 생모는 慶州金氏 縣令(從五品)을 지낸 金奉柱의 딸로 秋史 金正喜와는 7寸(內再從叔母)간이며, 趙基復과 추사는 戚弟(親族이 아닌 겨레붙이 즉 姑從, 內從, 外從 等의 관계)간으로 8寸이며, 조기복의 부인은 豊山洪氏로 洪泰榮의 딸이다

純祖1년(1801년) 辛酉 增廣試 生員 3等에 合格, 純祖10년(1810) 中都 등 하위 지방직을 두루 거쳐서, 擇差江界通政,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坡州市 廣灘面 龍尾里 山 80-1番地에 위치한 이 墓表는 조선시대 서예와 금석학을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가 墓標石에 직접 쓴 隸書로 새겨진 비문으로 2019년 8월30일 파주시 향토문화유산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이내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特異하고 書氣 넘치는 秋史 金正喜 先生이 쓰고 새겨진 글자는 다음과 같다.

"통정대부수경주부윤임천조공휘기복묘 증정부인풍산홍씨부좌"

「通政大夫守慶州府尹林川趙公諱基復墓 贈貞夫人豊山洪氏坿左」

 

여기에서 通政大夫는 品階名이며 正三品 堂上官의 명칭입니다. (정삼품에는 당상관이 있고 堂下官(通訓大夫)이 있음. 따라서 같은 정삼품이지만, 당상관(통정대부)은 대감님이요 정삼품 당하관(통훈대부)는 영감님으로 불린다.) 

경주부윤은 從二品 관직이므로 정3품 보다 높은 바로 위 품계입니다. 자신의 품계보다 한 단계 높은 직책을 받은 것으로 이를 분별하기 위해 품계와 직책 사이에 '守'字를 넣어 구분한 것입니다. 

반대로 품계가 높고 직책이 낮을 때는 품계와 직책 사이에 '行'字를 넣어 분별한다. 예를 들어 종2품 관직인 관찰사나 감사에 正二品(正憲 · 資憲大夫) 인사가 발령(除授)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가 관직을 떠나 타계했다면 그 묘비석에 다음과 같이 새깁니다. "正憲 또는 資憲大夫行慶尙監司 ㅇ公諱ㅇㅇ墓" 소위 말하자면 좌천되었거나, 합당한 자리가 없을 때 임시 방편으로 발령받아 부임한 후 관직을 마친 후 임종했을 경우이겠습니다. 

또한 '贈'은 사후에 품계를 올려 준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貞夫人은 從二品 또는 正二品입니다. 死後 받은 품계이니 타계 전에는 한 품계 낮은 正三品의 淑夫人이나 淑人이었을 것입니다. 

 

 

 

오른쪽 측면에 "척제 김정희 서(戚弟 金正喜 書)"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척제(戚弟)는 號가 아닌 겨레붙이 아우, 즉 조기복의 피붙이 아우 라는 뜻입니다.

 

秋史 金正喜(정조 10년(1786년)~철종 7년(1856년)선생은 다 아시는 바이기에 간략하게 기술합니다. 

조선 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실학자요 서화가로서 문신입니다. 24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같은 이름난 유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진적을 함께 감상하고 경학 및 금석문과 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으며 그 후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고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하였으며 文人畵를 바탕으로 뛰어난 詩書畵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불교에 대한 이해도 높았습니다.

純祖19년(1819년)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설서,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으며 1830년 생부 김노경이 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古今島에 유배되어 11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1836년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歷任 하였다.  이렇듯이 금석학자로 이름을 날리기 전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순수비를 두 번이나 찾아 올라가 비문을 해독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산 순수비 좌측면을 보면,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동네 친구 조인영(조대비 조카로 영의정을 지냄)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답사 후 김정희·조인영 함께 답사했다는 글자를 음각한 것이 확인됩니다.

 

 

아래 해설판의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추사 김정희 친필 조기복 묘표》

조기복의 墓表는 조선 후기 지방관이었던 조기복(1773~1839)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 조면호가 추사 김정희에게 묘표에 쓸 글자를 적어 달라고 부탁하여 세운 것이다. 조기복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이후 여러 지방직을 맡아 보았으며 「여원소고」 등을 남겼다. 조기복의 묘표를 쓴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서화가로 조기복과는 친척 사이였다. 조민호는 숙부 조기복이 1839년에 세상을 떠나자 먼 친척이자 스승이었던 김정희에게 묘표에 세길 글자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비석은 오석으로 되어 있고 비석을 바치고 있는 사각 모양의 대좌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김정희의 예서 기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다. 비석의 옆면에 "戚弟 金正熙"라고 새겨져 있어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라는 것이 확인되며, 묘표를 세우게 된 경위가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조기복 묘소의 정경.

 

 

2022년 11월 15일 파주시 광탄면 혜음원지 인근에서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