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혜음원지 (파주시) 惠蔭院址 (坡州市)」

鄕香 2022. 11. 13. 18:36

〈혜음원지(惠蔭院址)〉

우암산 비호봉(328.6m)의 서남쪽 산줄기의 고갯마루인 혜음령에서 북쪽으로 약 1.2km지점에 위치한 혜음원지는 우암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남쪽부분에 의지하여 터를 잡았기 때문에 입구인 남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혜음원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다만 「東文選」 과 「新增東國與地勝覽」 동의문헌에서 기록으로만 확인되어오다가 1999년 동네주민의 제보를 접한 동국대학교학술조사단에 의해 「惠蔭院」이라는 돋음 글자가 새겨져 있는 암막새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처음으로 그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위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혜음원지의 창건 배경 및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혜음원은 개경(개성)과 남경(서울)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합니다.

혜음원의 창건 시기는 고려 예종15년(1120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예종 17년(1122년) 2월에 완공되었는데 이때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別院(行宮)도 축조되었다고 전합니다. 두 기록으로 보아 혜음원은 고려 중기 개경과 남경 사이에 건립된 국립숙박기관이었으며, 동시에 왕의 행차를 대비한 행궁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문선」제64권 김부식 '혜음사신창기(東文選 第64券 金富軾 惠蔭寺新創記)' 를 대략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봉성현(峯城縣 파주의 옛 지명)에서 남쪽으로 20리 쯤 되는 곳에 조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허물어진지 벌써 오래였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石寺洞이라 불렀다. 동남방에 있는 모든 고을에서 개경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또는 개경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 이 길을 이용하여 다니는 사람이 많고 인적이 끊어질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산 언덕이 깊숙하고 초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어서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면서 몰래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사람을 해쳤다. 게다가 불한당들이 여기에 은신하면서간악한 짓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반드시 동행자가 많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갔는데도 살해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이었다. 

선왕(先王)인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신지 15년인 기해년(己亥年1119년) 가을 8월에 신하인 이소천(李小千)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남쪽지방을 둘러보고 왔다. 임금께서 "이번 길에 민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들은 것이 있느냐" 물으시니 곧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이를 딱하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사람이 안심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다. 아뢰기를 "전하께서 다행히 신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신에게 한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국가 재정도 축내지 아니하고, 민간의 노력도 동원시키지 않고, 다만 중들을 모집하여 그 허물어진 집을 새로 건축하고 양민을 모아들여 그 옆에 가옥을 짓고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해가 절로 없어질 것이며, 통행자의 난관이 해소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는 "좋다

네가 그것을 마련해 보라."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공무를 띠고 묘향산(妙香山)에 가서 스님들에게 말하기를 "아무곳에 큰 장애물이 있는데, 나라에서는 차마 토목공사를 가지고 백성을 괴롭힐 수가 없다. 옛날 스님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심을 발휘하였는데, 누가 나를 따라 그곳에 가서 일을 해보겠는가" 하였더니 절의 혜관(惠觀)스님이 기꺼이 그를 따랐으며, 그 무리 중에 따라가려는 사람이 백 명이나 되었다. 혜관 스님은 늙어서 가지 못하고 부지런하며 진실하고 기술있는 사람으로, 증여(證如) 등 16명을 선발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겨울 11월에 그곳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머물렀다. 임금께서 중 응제(應濟)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고 제자 민청(敏淸)을 부책임자로 삼았다. 목재와 기와를 모아 경자년(庚子年1120년) 봄 2월에 착공하여 임인년(壬寅年1022년) 봄 2월에 일을 모두 마쳤다. 절 건물이 불당과 유숙하는 건물부터 주방, 창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련되었고, 또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신다면 행여 한 번이라도 이곳에 머무르실 수 있으니 이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하여 따로 별원 한 개소를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였다. 

지금 임금(인종고려 제17대)께서 즉위하시어 절 이름을 혜음사(惠蔭寺) 라 내리셨다. 

 

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으니,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아니한가, 양곡을 비축하여 놓고 이자를 받아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던 것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는데, 소천(李小千)이 이것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 정성에 감동되어 희사하는 사람이 자꾸만 생겼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상당히 후하게 은혜로운 희사를 하시고, 왕비 임씨(任氏)도 듣고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곳에서 실시하는 모든 일은 내가 담당하리라."하시고 다 없어져 가는 식량을 보태주시며 파손되어 못쓰게 된 기구를 보충하여 주셨다.》 (파주시 「혜음원 이야기」에서 )

 

 

〈옛 혜음원의 구성〉

 

경기도 광탄면 용미4리 234-1에 위치한 사적 제464호 혜음원(惠蔭院)은 고려 때 김부식이 쓴 "혜음사신창기"에 의하면 고려 제 16대 예종(睿宗 재위 1105년 10월~1122년 4월) 17년(1122년) 2월에 왕명에 의해 건립된 院으로 여행자를 위한 국립숙박시설이었습니다. 당시 고려 사회는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끊이지 않고 부패한 지방관리에 의한 백성의 수탈이 심했습니다. 예종은 이러한 상황을 타계할 방안으로 민생을 파악하기 위해 近臣(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이소천(李小千 7품 직속 행정관)에게 지방 실태를 살펴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온 이소천은 예종에게 혜음령이 수림이 깊고 도적이 수시로 나타나고 호랑이가 출몰하여 통행에 매우 위험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크다고 보고하고 그 타계책으로 혜음령에 寺院을 건설할 필요성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예종은 이소천에게 사원 건립을 맡겼습니다. 이로서 이소천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혜음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고개(惠蔭嶺)는 개경(개성)과 상업 중심지 남경(서울)을 오가던 주요 교통로였습니다.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외국이나 아래 지방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발달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활발한 한강으로 인하여 남경(지금의 서울)이 번성함에 따라 북쪽 지방이나 개경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혜음령 일대는 숲이 으슥하고 도적떼가 많아 통행할 때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습니다. 이에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주기 위하여 예종은 이곳 혜음령에 승려들로 하여금 무료 숙박시설인 혜음원을 건축토록 하였으며 더불어 절 혜음사를 짓고 승려들로 하여금 혜음원을 관리 운영하도록 하였습니다.

 

 

(2022년 11월 12일 혜음원지 방문자센터 개관식에 경기옛길 오색체험한 날 ) 

 

 

혜음원지로 발길을 옮기다 뒤돌아본 행사장 정경.

(2022년11월12일 촬영)

 

 

혜음원 가는 길로 들어서기 전 옆 둔덕 위 넓은 공터가 궁금합니다. 

 

 

공터에 올라서 보니 혜음원지에 버금가는 넓이인데, 당시 혜음원에서 곡식을 일구던 밭이었나? 아님 마을이 있던 터였을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헤아려봅니다. 또한 옆 산자락은 앞 북쪽 골짜기에서 산자락을 끼고 남쪽 골짜기까지 대략150m 거리를 성처럼 엄청 큰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돌렸는데 쌓은 돌들을 보노라니 이끼가 뒤덮여 태고의 흔적을 보는 듯합니다. 

 

 

(혜음원 정문터를 향해 가는 길 정경)

 

 

혜음원터로 가는 길 우측 산자락을 둘러쌓은 성곽 같은 축대는 어떤 걸까? 그도 궁금하여 살펴보고자 다시 둔덕으로 올라섰습니다. 또한 산자락 아래 공터도 상당히 넓은데 어떤 용도였을까? 

 

 

(축대 중간 위치)

산자락 밑을 보니 큰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온 산자락을 성처럼 둘렀습니다. 중간 위치에서 좌우로 이어진 축대 길이가 어림잡아 150m 정도입니다.

 

 

(중간위치 동쪽방향 축대 정경)

쌓은 돌은 모두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으로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청석 응회암(靑石凝灰岩)입니다.

 

 

(중간 위치 서쪽 방향 축대 정경)

마치 성을 쌓은 듯이 보이는 이 축대는 어찌해서 산자락을 둘렀을까? 축대는 덤불 저 끝 골짜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축대의 규모로 보건대 山城이나 어떤 국가적 사업으로 짐작됩니다. 

 

 

현재까지 확인되어진 혜음원의 규모는 11단의 건물지 내에서 총 건물지 33동과 여러 조경시설 등이 있고 면적은 약 99,687㎡입니다. 하지만 혜음원이 자리 잡았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와나 토기편이 남쪽 주차장 뒤 편 논 일대와 북쪽 군부대의 고폭탄 사격장 일대까지 확인되는 것을 볼 때 사역의 범위는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공터 남쪽 끝에서 뒤돌아본 정경인데 상당히 넓습니다. 원터가 생기며 형성된 어떤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공터 북쪽 끝 둔덕에서 바라본 혜음원址 

혜음원 건물지의 조성대지가 남서쪽으로 서서히 낮아지는 골짜기이어서 지형에 따라 각 단마다 남쪽에 동서방향으로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한 후 건물지를 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지적 상황으로 인해 건물지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와 지하수를 단순히 배수가 목적이 아닌 조경의 요소로 이용한 것은 혜음원만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공터에서 내려서서 혜음원 정문 터로 발길을 옮깁니다. 

 

 

혜음원은 파주시 광탄면과 고양시 고양동을 잇는 고갯길인 혜음령의 명칭에서 그 위치가 추정되어 오다가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는데, 1999년 '惠蔭院'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지금의 혜음원 터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파주시는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단계적으로 혜음원터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20여 년 간 발굴조사 결과 전체 규모 약 23.930㎡입니다. 산등성이를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모두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하였습니다.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설치하여 외부와 구분하였습니다. 담장 내부에는 현재까지 조사결과 총 37동에 달하는 건물터와 우물터, 연못자리, 배수로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출토된 건물터는 중심이 되는 건물터 몇 곳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그 성격이나 용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문선"에 실려 있는 '혜음사신창기'(김부식 지음)에 따르면 혜음원은 행궁(별원), 절, 원 등 크게 세 부분의 건물群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혜음원의 모습도 이와 일치합니다.

행궁(行宮)은 국왕이 남경을 방문할 때 머물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절(寺)은 院의 관리와 유지를 담당하는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와 일반 민간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한 곳입니다. 

또한 혜음원은 흉년 · 전염병 등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 지역에 굶는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살기 어려워진 백성이 여행객을 위협하는 도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궁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물터의 배치와 구조 및 출토되는 유물은 개성의 고려 궁터 '만월대'와 유사하다고합니다. 이 밖에 계곡의 물을 끌어서 연못과 물을 활용한 조경시설을 건물 사이사이에 배치하여 혜음원 어디에서든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경 시설은 마치 혜음원이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혜음원 탐방은 '원터(院址)→ 절터(寺址)→별궁(行宮)→후원(後園)→울타리(墻) 순으로 둘러 보겠습니다.

첫 단으로 오르는 첫 데크계단 위는 혜음원 정문터 그리고 그 앞마당입니다. 연이어 데크계단이 4개가 보입니다. 

 

 

 첫 데크계단을 올라서서 혜음원 정문 앞마당에서 바라본 정문터(門址)와 문으로 이어지는 흰 화강암의 외곽담장 기초석이 우측에 가로 놓여 있습니다

 

 

가로 놓인 낮은 첫 댓돌에서 두 번째 댓돌 사이 공간이 정문터(門址)입니다. 좌측과 우측에 각각 정방형의 기초석이 2개가 일정한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고 좌우 기초석 그 사이 중앙 가로선상 가운데에 좌우로 각각 1개씩 문확철이 박힌 문확석이 있습니다.   

 

하트 안에 문확철이 있습니다. 

 

좌측 문확철과 문확석입니다. 문확석에 박혀 있는 문확철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특수보존처리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측 문확철과 문확석입니다.

문확석에 박혀 있는 문확철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특수보존처리 되어 있습니다. 

*문확철은 문기둥을 끼우기 위해 문기둥 초석의 상면에 설치한 원통형 철제 시설로 문의 회전을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문확석은 문확철을 고정하는 받침돌입니다. 

 

 

혜음원 동쪽(좌측) 외곽담장과 직선으로 정문터(門址) 안쪽과 바깥쪽에 위치한 정방형 초석 2개의 사이 가운데 문확철 2개가 나란히 직선으로 놓여 있어 대문이 있던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쪽 외곽담장 기반 위에서 정문터(門址)로 이어지는 혜음원 좌 · 우측 외곽담장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혜음원 건물배치도〉

 

 

〈원터(院址)〉

원터는 절터의 앞쪽 5단에서 9단에 이르는 공간입니다. 3-3 건물터에서 11-1 정문까지 이어지는 건물군의 중심선을 따라서 마당과 문터가 이어져 있습니다. 좌우로는 행궁터와 같이 단마다 세로 방향의 건물터와 가로 방향의 건물터가 서로 대칭되게 교대로 배치되었습니다. 다만 서쪽은 세로 방향 건물터가 두 겹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동쪽은 한 겹의 건물만 배치되어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원이 먼저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院 동쪽에 행궁이 들어서면서 원의 동쪽 일부가 행궁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원에 속한 건물은 가로 2칸 세로 1칸이 하나의 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가로 두 칸, 세로 한 칸을 한 단위로 하여 난방시설이 한 기씩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난방 시설은 바닥 부분만 남아 있어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온돌이 아닌 사각형 형태의 벽난로와 유사한 시설을 방 뒤쪽 벽면에 붙이고, 외부에서 나무를 때서 난방하던 시설이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른 유적에서 비슷한 사례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온돌이 보편화 되기 이전 상류층이 사용하던 난방장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하겠습니다. 

원터의 남쪽 앞부분에는 혜음원의 주 출입문이었던 정문이 있었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9-1 건물터 방향으로 양쪽에 기와를 얹었던 담장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양쪽 담장 너머로는 원할한 배수를 위한 큰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서쪽은 발굴조사 이전에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정문터에서 바라본  2번째 데크계단과 그 위 원터,

 

정문터와 문확철과 외곽담 정경 

 

 

혜음원 우측 서편에서 측면으로 바라본 정문터와 좌측 외곽 담장(동쪽)의 정경, 

 

 

원터 좌측 공간 건물지 정경으로 건물지와 내입형계단 사이에 원을 가로지른 수로가 있습니다.  

 

 

2번째 데크계단을 올라서서 바라본 8단 마당 내입형 돌계단과 그 위 3번째 데크계단입니다. 

 

 

원터 좌측(동쪽)에서 바라본 우측(서쪽) 건물지와 마당입니다. 건물터와 마당 사이에도 수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혜음원 각 단과 건물지 사이에는 縱橫으로 수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원터 좌측(동쪽) 건물지(누각터)에서 행궁터를 바라본 정경 

 

 

원터 우측(서쪽)에서 바라본 좌측(동쪽) 정경 

 

 

원터 우측 건물지 

 

 

혜음원 우측(서쪽)에서 좌측(동쪽)으로 바라본 상·하 원터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공간지대(일부 건물터와 마당)입니다. 위쪽 건물址 → 공간지대 → 아래쪽 건물터 모두 院터입니다. 

 

 

혜음원 좌측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정경입니다. 상·하 원터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공간지대입니다. 아래쪽 건물址 → 공간지대 → 위쪽 건물터 모두 院터입니다. 기와片을 쌓아놓은 곳과 두 사람 내외가 오르는 데크계단까지입니다. 

 

 

원터 좌측 끝 누각터에서 바라본 위쪽 院터 전경입니다. 아랫단에 좁은 공간이 있고 그 아랫단에 기와 편을 쌓아놓은 곳이 아래쪽 院터입니다. 원터 건물터 앞과 뒤쪽에는 그리고 건물터 사이마다 수로가 있습니다. 

上원터 위단은 혜음원을 관리하는 스님들의 거처인 절터입니다. 그리고 사진 하단에 초석이 있는 건물터는 누각건물터입니다. 원터를 건축한 이후에 행궁이 들어서면서 본래 원터의 건물의 일부였던 것을 헐고 누각을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곳입니다. 수로가 바둑판처럼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터(寺址)〉

 

절(寺)과 원(院)은 크게 보면 하나의 건물群이었습니다. 앞쪽에 원터가 위치하고 뒤쪽에 절터가 있습니다.

절터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3-3 건물터 및 4-2 마당과 주변 건물터를 포함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일대 건물의 기단과 마당에는 장식성을 강조한 기단 석재, 청석, 방전(方塼 25cmX25cm)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원으로 추정되는 앞쪽 건물과는 축조 방법이나 사용되는 재료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어 건물의 격이 구별됩니다. 3-3 건물터는 금당터로 추정됩니다. 건물의 기단은 장식성을 강조한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기단 윗면에는 청석이 깔려 있었던 곳입니다. 4-2 마당에도 청석을 깔아서 장식하였습니다. 4-4 건물터의 건물 내부에는 방전을 깔고 중앙부에 윤장대(불교 경문을 넣어두는 책궤)를 설치하였습니다. 4-1 마당에도 방전을 깔았습니다. 3-2 건물터, 4-1 건물터 등에서는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생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혜음원의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이나 식량, 생활용품 등을 저장했던 창고 등으로 쓰였던 건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절은 원을 관리하는 승려들이 예불을 드리고 생활하던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원에 머무는 일반인들에게 음식도 제공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원은 대체로 절에서 운영하는 것이 많았고, 또한 절에 소속되어 운영되고 절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혜음원은 본래 목적이 원을 운영하는 것이었고, 절은 원을 운영하는 승려들의 편의를 위한 부속 공간이었기에 원보다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혜음원 좌측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절터와 우측 행궁터 일부와 좌측 원터 일부가 담긴 정경)

 

〈혜음원 좌측(동편) 둔덕에서 우측(서편) 방향으로 바라본 절터〉

절터 좌측 끝 둔덕 밑에 석조(石槽)와 수로가 있습니다. 

 

 

(좌측에서 바라본 우측 법당 건물지 정경) 

건물지 끝 낮은 지대에 우물이 있습니다. 

 

 

혜음원 우측 산자락에서 바라본 절터 옆 우물터

 

 

우물 細部

 

 

절터 우측 끝에 붙어 있는 우물과 주변 정경으로 산자락 밑은 계곡이고 산 능선에는 혜음원 외곽담장이 있습니다. 

 

 

혜음원 우측 우물에서 절터 우측 끝자락에 올라서서 원 좌측(동쪽) 축대 밑 수조水槽를 바라본 절터 정경, 

 

 

절터 우측으로부터 첫 전돌이 깔린 곳으로 사방에 화강암으로 턱을 두어 마치 못처럼 꾸몄고 아랫단 배수로에 연결된 배수구가 땅속으로 있습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시설은 절터 좌측에도 있습니다. 

 

 

우측 두 번째 어두운 화강석 턱 아랫부분에 아랫단 배수로로 통하는 배수구와 배수로가 있는 것으로 위단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集水하여 아랫단 배수로로 원할하게 내려 보내기 위한 저수시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 細部 배수구

 

 

행궁 터 1단 아래의 공간에서 다시 1段 아래 법당 터입니다. 사찰에서 가장 중심인 법당 터는 절터 중간에 위치하며 화강석으로 正方形의 터를 구획하고 네 모퉁이에 4개의 초석이 있습니다. 그 정방형 안 바닥은 25X25cm 크기의 模塼을 깔고 정 중앙에 ╋字형 홈이 새겨진 정방형 화강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을 넣어 두는 책장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든 윤장대(輪藏臺 : 1번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는다는 불교의식)를 설치했던 흔적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모전을 깐 정방형 터 양쪽에 청석을 깔아 통로를 두었습니다. 

 

(정면으로 담은 불당 터)

 

불당터 전체에 깔려 있는 전돌 正中央에 위치한 십자형 홈 윤장대(輪藏臺)를 세웠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절터 중간에서 우측 법당터를 바라본 情景)

 

 

정면으로 바라본 법당터 

 

 

참고 〈오대산 월정사 윤장대 (五臺山 月精寺 輪藏臺 : 1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

 

 

법당 건물터 좌측(동편) 정경입니다. 마주보이는 소나무 아래 축대 밑에 수로를 앞에 둔 장방형 석조가 있습니다. 돌출형 보석식 돌계단 위쪽 단은 행궁 앞 공간(뜰)에 난방시설이 있고 그 위쪽 단 화강암 축대 위는 행궁터입니다. 

 

 

〈석조(石槽)〉

화강석으로 짜 맞춘 석조 앞면 좌측에 물을 배출하는 구멍이 있고 윗면 우측에는 물이 가득차면 넓게 퍼져 넘쳐서 수조 全面을 적시며 밑 지면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윗면에 홈을 만들어 좁아진 물줄기에 수력이 가해져 물 빨이 세차서 앞에 있는 수로에 떨어져 흘러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안을 청소 후 부순물이나 물의 앙금(침전물) 또는 물의 양이 적을 때는 수조 좌측 구멍으로 배수 또는 배출시킬 것입니다.

 

 

행궁터와 절터 사이에 위치한 공간(뜰) 우측 정경입니다. 즉 절터와 행궁의 구분 짓는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절터와 행궁터 사이에 있는 공간(뜰) 좌측 정경입니다. 투명 아크릴로 덮여 있는 곳은 난방시설 유구입니다. 좌측 위쪽 화강암 돈대 위는 행궁, 계단 아랫단은 절터입니다. 

 

 

일직선으로 뻗은 난방시설 공간터 중심으로 우측 위쪽은 행궁 건물지, 좌측 아래쪽은 절터 건물지입니다. 

좌측 절터에서 난방시설 위로 오르는 계단은 유일하게 가구식 계단입니다. 다시 행궁으로 오르는 내입형 계단이 있습니다.  

 

 

〈파주 혜음원지의 난방시설(暖房施設)〉

 

혜음원지의 난방시설은 행궁터 안 임금이 머무르던 정전 건물과 일반인이 숙식했던 원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별원(行宮) 건물에서는 돌로 만든 난방시설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의 왕궁터 만월대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가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원터의 난방시설은 돌 또는 벽돌과 진흙으로 만들었으며, 위쪽이 모두 없어지고 아래쪽만 출토되었습니다. 'ㄷ'자 모양으로 방 두 칸에 한 개씩 설치되었는데, 불에 붉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난방시설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남겨진 모습으로 본다면 오늘날의 벽난로와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행궁 난방시설)

 

좌측 공간에서 바라본 행궁터 화강석 축대가 둘려져 있습니다.

 

 

좌측 둔덕(동남쪽)에서 대각으로 바라본 행궁터 

 

 

좌측(동쪽) 둔덕에서 측면으로 바라본 행궁터 전경.

 

 

별원후원 지금은 잔디지만 다양한 꽃과 나무를 가꾸었을 것이다. 후원 귀퉁이에 언덕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으는 집수구(集水溝)가 있습니다. 집수구에서 행궁담 바깥 지면밑으로 배수관 시설이 행궁 아래 수로에 연결 되었습니다. 

 

(11월15일 촬영)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惠蔭院址 配水 體系)〉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는 외부와 내부로 나뉩니다. 외부 배수 체계는 혜음원지 북쪽과 북동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통제하였습니다. 북쪽 계곡의 물은 혜음원지의 서쪽 외곽 배수로를 따라 흐르고, 북동쪽 계곡의 물은 행궁지 동쪽 담장과 축대 안쪽의 배수로를 따라 흘렀습니다. 배수로 곳곳에는 물을 모아 두는집수 시설을 설치하여 물의 양과 속도를 조절하였습니다. 

내부 배수 체계는 빗물을 내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법당터 서쪽의 연못에서부터 시작된 물은 건물 주변의 배수로를 따라 흘러 마지막으로 중문터 옆에 있던 연못에 모였습니다. 이처럼 건물 어디서나 흘러오는 물소리와 물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연못 등의 조경은 고려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혔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는 배수기능이라는 실용성 뿐만 아니라 조경 요소를 더함으로써 시청각적 즐거움을 추구한 고려인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집수구 세부(集水溝細部)〉  ↕ 

 

둔덕 위에서 행궁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모퉁이로 모아서 배수로에 균일하게 흘려보내는 집수구(集水溝)를 발아래에 두고 행궁을 대각선으로 바라본 정경, 맞은 편 소나무 옆에도 깨진 기와들을 쌓아 놓은 와당더미가 있고 그 아래 계곡가에 우물이 있습니다. (11월12일 촬영)

 

 

행궁 좌측 뒤 집수구로부터 혜음원 정문 좌측 수로로 이어져 내려오는 수로의 정경입니다. 현재는 흙과 부토가 가득 쌓이고 낙엽이 덮여 있습니다.  

 

 

혜음원 좌측(동쪽)배수로는 누각터 좌측을 지나 넓어진 수로에서 流速이 느려지고 다시 두 줄기로 나뉘어져 바로 외곽담장 밑 두 개의 배수구를 통해 외곽담당 바깥으로 나갑니다. 

 

 

위 하트 부 細部

 

 

〈행궁터(별원)行宮址(別院)〉

 

행궁은 혜음원지 북동쪽 일대에 있었습니다. "해음사신창기"에 따르면 행궁은 혜음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없었는데, 혜음원을 지은 직후 행궁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혜음원 동쪽에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발굴조사에서도 먼저 지어진 원 일부를 헐고 행궁을 만들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행궁 건물 중에서 국왕의 거처가 되는 '正殿이 가장 뒤에 있었으며 아래쪽 맨 끝에는 대형 누각건물이 있었는데 연회나 모임을 위해 지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정전터 중앙에서 누각 건물터 중앙을 연결하는 선이 행궁터의 기본축인데 이 축의 선을 따라서 문과 마당이 단마다 교대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행궁은 별도의 담장인 내곽담을 경계로 출입을 통제하였습니다. 

정전 뒤에는 계단식 화단인 화계가 있으며 담장이 그 외부를 감싸고 있습니다. 정전 앞으로는 수행원들이 사용했던 건물의 세로 방향인 마당 부분과 가로 방향인 문터 부분이 단마다 교대로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누각 건물 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원래 처음 혜음원을 지었을 때 원에 딸린 건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행궁을 증축하고 누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앞쪽의 조망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전 건물을 헐고 새로 연못을 만든 것입니다.

 

(행궁 뒤 花階 위에서 바라본 정경)

 

행궁 뒤 우측 공간에서 바라본 정경

 

 

행궁 뒤 외곽담장 터에서 바라본 정경으로 넓은 잔디 공간의 모습.

 

 

행궁 뒤 소나무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서 혜음원 정문으로 이어지는 혜음원 외곽 담장 기초석이 외곽을 따라 줄지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 16代 睿宗 〈1079(문종 33)∼1122(예종17)〉 재위1105~1122.

이름은 우(顒) 자는 세민(世民). 개성왕씨(開城王氏). 숙종(肅宗)의 장자로서 어머니는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柳氏)이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 9성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이때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인과 무학 17인으로 하며, 명유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니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1122년 4월에 죽자, 태자 해(楷:仁宗)가 즉위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외곽 담장 바깥 산자락 밑에 쌓아 놓은 기와조각(瓦當片)들)

 

 

기와더미에서 바라본 정경으로 외곽담장기초석이 한 획을 가로 그은 듯이 一字 보입니다. 

 

 

혜음원 우측 조망대 옆에 쌓아놓은 정사각형 전돌(方塼)과 기와조각(瓦當片)

 

 

전돌과 와당더미 細部

 

 

다시 혜음원 외곽담장을 정문 터에서부터 좌측으로 시작하여 둘러보기 위해  정문 터로 내려와서 좌우로 뻗은 외곽담장을 동쪽(좌측) 담장에서 바라본 정경입니다. 담장의 폭은 170cm로 궁궐 담장 못지않습니다.

 

 

외곽 담장은 원터 앞 정문 터(門址)에서 좌우로 좌청룡 우백호처럼 혜음원을 둘러 싼 산 능선을 따라 둘려졌습니다. 마치 말굽 편자처럼 ..

아래 문지에서 혜음원 좌측(동쪽)으로 담장의 기초가 필자가 서 있는 능선으로 뻗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뻗어가는 담장 기초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혜음원터를 두른 외곽담장은 돌(石)과 진흙(泥)으로 쌓아 기와를 덮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금하 건 못 참아 담장 위에 가로로 누워보니 폭 170~175cm 입니다. 소나무 뒤 담장 기단에 서 있는 분으로 대강 추정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조만치 앞에서 ㄱ자로 꺾입니다.

 

 

행궁 북동쪽 모퉁이 위쪽 넓은 공지에서 직각으로 꺾어 공터를 가로 질러 계곡 건너편 산허리를 타고 능선으로 이어집니다. 

 

 

수로 건너편 담장 터는 계곡을 건너 단숨에 등선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혜음원과 우측 능선 사이 계곡에 위치한 수로입니다.

 

 

담장은 단계적으로 산허리를 타고 오릅니다.

 

 

산마루에 오르자 다시 ㄱ자로 꺾어 능선을 타고 갑니다.

 

 

좌측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뭇가지 사이로 혜음원지와 건너편 담장 줄기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등성이는 비탈지고 그 위로 담장기초석이 지네처럼 기어갑니다.

 

 

내려온 능선을 뒤돌아본 정경입니다. 담장 터 주변에는 두텁고 견고해 보이는 깨진 기와片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 안타깝습니다. 

 

 

담장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瓦當片

 

 

이제 능선은 쇠하고 담장은 혜음원 정문으로 내달립니다.

 

 

이쪽 담장 끝머리가 계곡 건너 저쪽 담장 끝머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머리냐 내가 머리냐? 

 

 

혜음원 정문을 뒤로한 담장은 다시 동쪽 능선을 타고 오르고 있었습니다. 외곽 담장은 마치 자전거 자물쇠 같은 모습입니다.

 

 

혜음원 內 행궁 동쪽 끝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외곽 수로 끝 배수구가 담장 밑에 얼굴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惠蔭院址 配水 體系)〉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는 외부와 내부로 나뉩니다. 외부 배수 체계는 혜음원지 북쪽과 북동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통제하였습니다. 북쪽 계곡의 물은 혜음원지의 서쪽 외곽 배수로를 따라 흐르고, 북동쪽 계곡의 물은 행궁지 동쪽 담장과 축대 안쪽의 배수로를 따라 흘렀습니다. 배수로 곳곳에는 물을 모아 두는 집수 시설을 설치하여 물의 양과 속도를 조절하였습니다. 

내부 배수 체계는 빗물을 내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법당터 서쪽의 연못에서부터 시작된 물은 건물 주변의 배수로를 따라 흘러 마지막으로 중문터 옆에 있던 연못에 모였습니다. 이처럼 건물 어디서나 흘러오는 물소리와 물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연못 등의 조경은 고려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혜음원지의 배수 체계는 배수기능이라는 실용성 뿐만 아니라 조경 요소를 더함으로써 시청각적 즐거움을 추구한 고려인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담장 안쪽 排水路와 水出口 의 모습입니다. 경사지고 좁은 수로를 빠르게 내려온 물길을 넓혀 流速을 잡아주고 다시 양분해서 물의 흐름을 느리고 약하게 해서 담장의 훼손을 방지해 주는 구조입니다.)

 

(정문 옆 담장 밑 배수구(排水口)입니다.)

 

정문(門址)에서 동(左) · 서(右)쪽 으로 뻗어나가는 외곽담장의 자태(姿態)와 담장 안쪽과 바깥쪽 배수로 모습,

 

 

자주색 선은 정문(門址),

연두색 점선은 외곽담장.

 

 

혜음원 좌우에서 내려온 물이 우측의 세 그루 나무 있는 곳에서 합수합니다.

 

 

원터 앞 공간에서 바라본 정경으로 '혜음원址 방문자 센터' 건물과 주차장과 개관식행사 흰 천막이 보인다. 내 발길은 세 그루 소나무 아래 혜음원을 감싸고 흐르다 혜음원지 앞에서  하나로 합치는 합수머리를 보기위해 갑니다. 

 

 

혜음원 건물들을 감싼 좌우 수로에서 흘러온 물이 합수되는 곳입니다. 

 

 

〈혜음원지 연혁〉

1120년(예종15년) 착공 (「惠蔭寺新創記」) 

1122년(예종17년) 완공 (「惠蔭寺新創記」)

1122~3년(예종17년) 별원 완공 (「惠蔭寺新創記」) 

1140년(인종18년) 보수공사 시작(「庚申年」銘文기와 출토)

1144년(인종22년) 보수공사 완료  (「惠蔭寺新創記」)

1999년 주민제보로 지표조사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

2001년 1차,  2002년 2차 발굴조사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2002년 경기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81호 지정

2003년 3차, 2004년 4차 발굴조사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64호 지정 

2007년 종합정비 기본계획수립. 및 제5차 발굴조사(한백문화재연구원). 1~4차 발굴지 기초정비.

2009년 유적정비 실시 설계

2010년 1차 유적정비공사

2011년 6차발굴조사 

 

 

방문자 센터 내 국악 대금과 가야금 협주

 

 

《혜음원지 출토 유물 일부》

 

〈'혜음원'이 새겨진 암막새(惠蔭院 銘 平瓦當)〉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암막새 앞면 가운데 '혜음원'이라는 글자가 돋을새김 되어 있고 그 좌우에 돌출된 동그란 문양(일휘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와의 발견으로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혜음원의 실체가 있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으며 오늘날 혜음지를 대표하는 유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惠蔭院 銘 암막새 글자의 탁본

 

 

기록으로만 알고 있었던 혜음원, 그 실체의 장소를 알려준 문제의 기와입니다.

 

 

〈혜음사 명 기와〉 

銘文은 '경신이월삼십일혜음사조장학명(庚申二月三十日惠蔭寺造匠斈明)'

즉 경신년 2월30일에 혜음사 장인 학명이 만들었다.가 되겠습니다.

 

 혜음사명기와 탁본 

 

 

〈인면기와(人面瓦當)〉

 

투박하고 자애로운 모습의 부처상입니다.

 

 

인면기와 탁본

좌측은 女, 우측은 男의 인상을 느낍니다.

 

 

 

〈용머리 모양 기와(龍頭瓦當)〉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기와입니다. 이 용머리 기와는 추녀마루 잡상들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에서 번개를 치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낼듯이 박진감이 넘칩니다. 

국내에는 고려시대의 용머리 모양의 기와가 전해지는 예가 매우 드물어 이 기와의 가치가 큽니다. 

 

 

이 장식기와는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에 상시 전시되어 있었던 것인데, 10여년 만인 11월24일 찾아가 보니 수장고에 입납되었는지 볼 수 없었습니다.

 

 

 

〈잡상(雜像)〉 

잡상은 장식기와의 하나로 추녀마루에 장식되는 조형물입니다. 이를 만드는 사람을 雜像匠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잡상이 등장한 것은 고려 때부터 인 것으로 여겨지며, 「觀經變相圖」의 서품(일본 大恩寺 및 西福寺 所藏) 등에 세부는 불분명하지만 웅크리고 앉은 2 · 3개의 잡상이 궁전 지붕에 그려진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잡상은 좋은 연구 자료가 되겠습니다. 

혜음원의 잡상은 새와 물고기 형상을 한 두 종류가  출토되었습니다. 물고기는 火魔를 경계하며 물리치는 의미를 가지며, 새는 하늘과의 소통을 의미합니다.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의하면,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十神像을 일러 잡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소설 西遊記에 나오는 인물 및 土神을 형상화하여 추녀마루에 올려놓아 살()을 막기 위한 벽사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하면, 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免新許參)할 때 반드시 대궐문루 위에 이 十神像 이름을 단숨에 10번 외어 보여야 받아들여진다(許參)고 하면서, 대당사부(大唐師傅),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상을 적고 있다. , 여기에서의 대당사부는 삼장법사 玄奘이고, 손행자는 孫悟空, 사화상은 沙悟淨 들로, 바로 서유기에 등장하는 자들 또는 중국 토신의 이름들입니다. “典律通補에도 지붕 위에 손행자 등의 鬼物을 만들어 놓는다고 적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궁궐, 문루, 관아, 陵祠, 사찰의 지붕 위에 모두 잡상이 보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19세기 이후 자료만 남아 있으며, 사찰 지붕에는그 예를 찾아볼 수 없고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등 궁궐에서만 볼 수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실체를 보면 숭례문(1448) 9, 창경궁 (弘化門17세기) 5, 창덕궁 (敦化門 17세기) 7, 수원 (八達門 1796) 4, 창덕궁 (仁政殿 1804) 9, 경복궁 (慶會樓 1867) 11, 경복궁 (東十字閣 1865) 5, 덕수궁 (中和殿 1906) 10개여서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 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한 연구 정리가 없는 실정입니다.

 

고려 시대의 잡상으로는 새의 형상이 주를 이룹니다. 

 

 경복궁 내 대표적인 건물들의 잡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勤政殿 (7) 思政殿(7) 康寧殿(7) 交泰殿(7) 修政殿(6) 慶會樓(11) 興禮文(7) 光化門(7) 

 잡상의 형상도 맨 앞 대당사부를 제외 하면 건물 간의 그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경회루 앞 수정전에는 대당사부는 없고 손행자가 앞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당사부(大唐師傅),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상을 경회루 잡상에 비견해 볼만하겠습니다. 

 

〈경회루〉 잡상 11개 

〈慶會樓〉 (국가적 연회를 여는 곳)

 

〈근정전〉 잡상 7개 

〈勤政殿〉(국가적 큰 행사를 치르는 전각)

 

〈사정전〉 잡상7개.   

〈思政殿〉(왕의 집무실) 

 

〈강녕전〉 잡상7개,   

왕과 왕비의 침소에는 용두(龍頭)가 아닌 취두(鷲頭)가 대신하고 있다.  

  

 

〈康寧殿〉 (왕의 침소),  양 옆 부속건물의 추녀마루에는  5개의 잡상이 있는 것이 보임 

 

왕과 왕비의 침소에는 용두(龍頭)가 아닌 취두(鷲頭)가 대신하고 있다.  또한 용마루도 없다. 

龍은 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임금 위에 왕 없으니 용이 잠자는 그 위에 다른 용이 있을 수 없다. 용마루도 용두도 없는 까닭이다. 왕의 얼굴은 龍顔, 왕의 눈은 龍眼, 왕의 눈물은 龍淚, 왕의 자리는 龍床, 왕의 옷은 龍袍 등으로 용은 왕을 대변한다. 이는 왕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태전〉 잡상7개.  ↓ 

왕과 왕비의 침소에는 용두가 아닌 취두(鷲頭)가 대신하고 있다.  또한 용마루도 없다. 

 

 

〈交泰殿〉 왕비(中殿)의 침소.   

왕과 왕비의 침소에는 용두가 아닌 취두(鷲頭)가 대신하고 있다.  또한 용마루도 없다. 

 

 

〈수정전〉 잡상 6개. 대당사부가 없다.  ↓  

〈修政殿〉(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임금을 보필하고 경학을 연구하던 곳 )

 

유일하게 대당사부가 없는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4년(1867년)에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 주변에 200칸이 넘는 행각과 전각이 있었는데,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모두 헐렸다.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된 고려 궁궐 앞 막새 (일제강점기 1908년 발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품

혜음원터에서 발굴된 와당들의 문장이나 문양이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월대를 비롯 개성 일대의 고려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막새입니다. 막새는 기와지붕 끝을 깔끔하게 마감한 장식적 효과를 겸한 기와입니다. 고려시대 막새는 대체로 삼국시대 이래의 연화문 막새를 계승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다 중기 이후에는 동그라미 모양의 원문圓文(햇무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일훈문日暈文이라고도 함) 또는 원(元) 나라의 영향을 받은 범자문(梵字文) 등이 막새 문양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만월대에서 발굴된 장식기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품

장식기와는 주로 용마루나 기와들이 서로 겹쳐지는 위치에서 지붕을 깔끔하게 끝내기 위해 사용된 기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새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칠을 입힌 접시(漆器楪匙)〉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이 칠기 접시는 고려시대에 나무로 만든 굽다리 접시에 목재 띠를 직물(綿섬유 麻섬유)과 바탕칠로 붙이고 고운 흙을 펴 바르고 그 위에 옻칠을 고르게 여러 번 칠해 만든 목기입니다. 면직물을 입히고 옻칠을 한 칠기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X-ray 촬영 결과 접시 바닥에서 '惠蔭'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어 제작시기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공예기술의 진수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X-ray 촬영으로 확인된 銘門 「惠蔭」

 

 

측면으로 바라본 모습

 

 

 

 

〈부처(金銅佛立像)〉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청동에 금을 입힌 부처상(金銅如來立像)은 6.3cm의 작은 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의 모습과 옷 주름의 처리, 윤곽선, 신체의 표현 그리고 부처가 밟고 있는 대좌의 연꽃 문양 등 섬세한 표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의 理解》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흔히 형태. 색. 문양 등 세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되곤 하는데, 먼저 매병(梅甁)에서와 같이 흐르는 듯한 線의 유려함, 비취옥과 같은 翡色, 그리고 자연을 소재로한 문양이지요.이러한 청자의 아름다움은 이들 세 가지의 요소가 각기 독자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 돋 보이는 것입니다. 과장되거나  장식적인 중국청자와는 달리 우리의 고려청자는 線이 단정하고 유려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만져 보고 간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에 또 이름모를 풀꽃이나 청초한 들국화, 그리고 구름과 鶴, 물가 풍경 등 소박하고 단아하고 부드럽고 고고한 기품의 자연을 소재로한 문양이 도자기 형태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조건도 유약색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고려 청자의 비색 유약은 맑고 투명하며 바탕흙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지요. 가는 음각 선의 섬세한 문양도 그대로 배어 나오기 때문에 물에 비치듯 아름답고 맑은 것이지요. 또한 청자의 맑고 푸른색은 사람을 평온하게 하며 초지상적인 세계로 이끕니다. 청자의 푸르고 맑은 비취색(翡翠色), 이 비취색은 비취옥과 같은 색이라 하여 고려 사람들은 翡色이라 했지요. 그 翡色 또한 어떤 염료로 인한 색이 아닌 자연발생적인 색이기에 더욱 신비한 것입니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전통적인 회유 기술을 바탕으로 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 낸 秘技입니다. 유약과 바탕 흙속에 함유된 미량(1~3%)의 산화 제2철(Fe2o3)이 환원염(1250℃~1400℃)으로 불에 구워지고 나면 산화 제1철(FeO)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색입니다. 이러한 화학변화이외에도 유약 속에 남아 있는 미세한 기포에 의한 빛의 굴절, 그리고 밝은 회청색의 바탕흙과 어우러져 나타나는 색으로 아주 엷은 녹색이나 밝은 회청색을 띱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자의 유색을 비취옥색에 견주어 비색(翡色)이라 하지요. 비색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사람들이 이미 일컬은 말입니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아름다운 녹색 자기는 열에서 하나를 얻을 만큼 어려우며 이는 하늘의 조화를 빌린 것이다. 하였으며,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그릇색의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 부른다. 근래에 들어 그 제작이 더욱 정교해지고 색이 더욱 좋아졌다" 라고 하여 그들 스스로가 비색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색은 중국청자의 비밀스러운 색(秘色)과 對比되는 용어로, 여기에는 그들 스스로가 만든 청자에 대한 고려인의 자긍심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北宋代의 여관요 청자의 秘色이 그 절정기에 달했을 때도 북송의 지식인들은 고려청자 翡色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 하였으며, 북송시대의 대학자 태평노인이 편찬한 수중금(袖中錦)에 중국 정요(定窯)의 백자와 고려청자의 비색을 천하제일이라 한 것으로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고려 청자 당초문육각접시(高麗 靑磁 象嵌唐草文六角楪匙)〉  

육각 각 면마다 당초문양을 음각으로 파내고 그 자리를 백토로 메우고 유약을 굽다리와 바닥까지 고르게 발라 소성한 팔각 접시로 왕실에서만 쓰이던 것으로 아쉽게 깨졌지만, 흔치 않은 귀품입니다. 

 

 

〈고려 청자 도룡용문육각접시(高麗 靑磁 象嵌魶文六角楪匙)〉  

육각 각 면마다 도룡용문양을 음각으로 파내고 그 자리를 백토로 메우고 유약을 굽다리와 바닥까지 고르게 발라 소성한 팔각 접시로 아쉽게 깨졌습니다.

 

 

〈청자상감편복투각국화문육각접시(靑磁 象嵌透刻蝙蝠菊花文六角楪匙)〉

 

비록 깨졌지만 문양의 배치가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육각 각 내면 구연부 아래 뇌문을 띠 형태로 음각으로 돌려 새긴 그 아래 각 면마다 국화문양을 음각하고 면과 바닥이 만나는 꺾인 6곳에 음각 점선문으로 육각을 표현했고 그 안쪽에 박쥐문양을 각 면에 음각으로 새긴 후 그 안에 두 줄의 원을 음각으로 새긴 그 가운데에 화문(花文)을 음각한 후 음각한 모든 문양을 백토로 메우고 유약을 발라 구워낸 고려 중기 청자상감육각접시입니다.   

 

 

〈청자상감편복투각국화문육각접시(靑磁 象嵌透刻蝙蝠菊花文六角楪匙)〉

위 접시와 같은 상감청자육각접시입니다. 

 

 

〈청자 발(鉢) 

 

 

청자 접시 일괄

 

 

2022년 11월15일 혜음원지에서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