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

鄕香 2022. 12. 7. 00:06

《북한산 비봉 北漢山 碑峰》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는 삼국시대 신라 제 24대 진흥왕(진흥왕16 : 555)의 영토 확장과 순수의 목적, 순수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불교의 이상적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를 원하였으며 불과 수 년 만에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넓혀 위업을 이루었습니다여기에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 되고자 한 젊은 화랑들의 헌신적인 희생도 한 몫 하였습니다. 568년 진흥왕은 太王을 자부하며 변경까지 수레를 몰아서 나라 안을 살피는 순수巡狩의 길에 올랐습니다. 북한산을 거쳐 8월에는 함경도 함흥에 있는 황초령黃草嶺 이르러 비문을 남겨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신라 진흥왕순수비에 즈음하여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신라를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야심찬 왕입니다. 어린 나이(7)에 즉위하여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으나 551년 약관18세에 이르러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열어 나갔습니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또는 증평)과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 기지를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습니다그리하여 백제 성왕은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진흥왕은 居柒夫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8 장군에게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습니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지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 사이에 맺었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이듬해(554)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습니다. 신라는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 교통를 확보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던 것입니다성왕의 죽음을 가져온 관산성 전투 이 후부터 백제와 신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관계로 빠졌으며 이는 지금의 한반도에 있어서도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습니다

 

김무력( 金武力)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형 김노종(金奴宗), 김무덕(金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 귀족이 되었습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좌(北漢山眞興王巡狩碑座)사적 제228호.

신라 제24대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 동북 해안에 이르는 지대와 가야를 쳐서 넓힌 후 순수할 때 영토의 경계를 정하고 기념비를 세운 자리입니다비석을 세운 이후 1,200여 년 동안 잊혀 오다가 조선 純祖 16年 丙子年(1816) 추사 김정희가 비문 六十八字를 판독하여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북한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여러 고을에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를 석방하게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후 비석이 풍화에 부식되고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고 비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6.25전쟁 당시 총상으로 금간 자리가 갈라져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하여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봉의 옛 비석자리에는 복제품을 만들어 설치하였습니다

 

 

「비문  碑文」

현재 판독된 글자 수는 137자입니다.

 

진흥대왕급중신등순수△△지시기 / △언△령갑병지방△△△△△△패주설△ 상 △△ / 지소용고사서△△△△△상전지시신라 △ 왕△ / 굴덕불△병고△△△△△△건문대득인민 우 재척 / △시순수고△△△민심 욕노뢰여유충신 정 성△ / △가가▽△△이△△△△△△속로과한 성 척△ / 견도인△거석굴△△△△각석지사 / 척간내부지일척간사록령력지잡간남천 군 주사 / 부지급간미지대내려△△△사록굴정차 내 / ▽ △지△공유칙수△△△△겁초립 조 비 △ / 순수견△△△△△△△△세기정 △ △△ 〉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보제 3호.)

 

순조16(1816) 병자년 7월에 약관 20세의 김정희가 김경연과 비봉을 찾아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하였음을 달필의 해서체(楷書體)로 새겼고, 다시 11년 후 순조27(1827)정해년 6831살의 김정희와 그의 친구 조인영(趙寅永)이 비봉을 찾아와 비문에 남은 글자 68자를 판독하였음을 김정희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새겨 놓았습니다.

여기서 趙寅永 趙 大妃 (효명세자비 신정왕후)의 친정아버지(國舅) 조만영(趙萬永)의 동생이자 조 대비의 작은 아버지입니다. 조인영은 순조19년(1819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바로 응교(정4품)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형(조만영)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弘文錄 · 都堂錄에 선임되었고 순조 22년(1822년) 함경도 암행어사 복명 후 대사헌(從二品)에 특진되었으니 불과 4년 만에 중앙과 지방행정의 감찰과 고발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수장이 되었으며,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 한 후 이조참의 · 대사성 · 世孫左諭善 · 예조참판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른 인물이다.

 

(총탄흔적이 있는 뒷면은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약간 비스듬히 담았습니다.

서쪽을 향한 순수비면은 총탄 흔적이 狼藉합니다.)

 

 

신라 진흥왕순수비 측면에 조선 純祖 때 추사 김정희가 두 번에 걸쳐 이 비석에 다음과 같이 刻字를 새겨 놓았습니다. 

우측 "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往"  (해서체로 쓴 글자)

좌측 '丁亥六月八日金正喜 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 추사체로 쓴 글자) 

 

가운데 새긴 '己未八月△日 李濟鉉 龍仁人'은 秋史와 상관없는 상식 없는 사람(이재현)이 문화재에다가 長壽을 기원하는 의미로 새긴 글자입니다. 여기서 己未年은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위 細部)

2019년 7월13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