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1745~1816 이후)의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圓.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웅輒醉翁 등이며 김해인(金海人)입니다.
화원으로 1781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의 초상을 제작하는데 참여 하여 그 공으로 연풍현감延豊縣監을 지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성격이 대범하여 신선같아 보였다고 하나 연풍현감 시절 선정을 베풀지 못하여 백성의 원성이 잦았으며,
그로 인해 삭탈괸직되었습니다.
『 金剛全圖 第二帖 (十二幅) <13~24>』
「 《경포대(鏡浦臺)》《호해정(湖海亭)》《능파대(凌波臺)》《옹천(甕遷)》《청간정(淸澗亭)》《망양정(望洋亭)》
《문암(門巖)》《성유굴(聖留窟)》《월송정(越松亭)》《낙산사(洛山寺)》《관음굴(觀音窟)》.《토왕폭(土王瀑)》」
第 13 幅 《경포대(鏡浦臺)》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4 幅 《호해정(湖海亭)》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5 幅 《능파대(凌波臺)》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6 幅 《옹천(甕遷)》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7 幅 《청간정(淸澗亭)》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8 幅 《망양정(望洋亭)》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19 幅 《문암(門巖)》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20 幅 《성유굴(聖留窟)》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21 幅 《월송정(越松亭)》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22 幅 《낙산사(洛山寺)》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23 幅 《관음굴(觀音窟)》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第 24 幅 《토왕폭(土王瀑)》
朝鮮時代/金弘道1748年(44歲)作/絹本淡彩 各 30.4 × 43.7cm / 個人所藏
畵帖은 《금강사군첩(金剛四群帖)》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眞景山水) 화첩입니다. 1帖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겉표지에 「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되어있을 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제화시(題畵詩) 등은 일체 없고 각 폭 그림마다 해당 진경(眞景)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이는 단원 글씨는 아닙니다.
이 화첩은 본래 70폭이었다 하는데 근년(近年)에 10폭이 흩어지고 60폭만이 다시 5첩으로 꾸며진 모양입니다.
흩어진 10폭은 다음과 같습니다. { 1.청허루(淸虛樓), 2. 천연정(天然亭), 3. 영랑호(永郞湖), 4. 단발령(斷髮嶺), 5. 정양사(正陽寺), 6. 만폭동(萬瀑洞), 7. 신계사(神溪寺), 8. 옥류동(玉流洞), 9. 외선담(外船潭), 10. 유점사(楡岾寺).입니다.
본래 이 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의 해산승경(海山勝景)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니던 화첩인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서영명위장해산화권(書永明尉藏海山畵卷)」(『淵泉集』권20)과「 제단원해산첩(題檀園海山帖)」칠십수 선이십삼(七十首 選二十三) (『淵泉集』권4) 및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1786~1841)의 「 제해산첩후(題海山帖後)」(『삼롱을참(糂礱乙懺)권5)등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화첩이 정조대왕의 유일한 부마도위(駙馬都尉)이던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1793~1865)가 지녔던(舊藏)것이며, 그 정조 어람본(御覽本) 해산첩(海山帖)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연천(淵泉)과 항해(沆瀣)는 영명위의 형(伯仲氏)들로 이들이 남긴 윗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정조임금이 단원에게 관동의 海山 승경을 그려 오게 하자 단원은 왕명을 받들어 70폭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되고 정조는 이를 5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왕실 內部에 비장합니다. 그 뒤 순조 9년(1809년)에 순조가 이 화첩을 매제인 영명위에게 하사하게 되고 영명위는 3년 뒤인 순조12년(1812년)에 맏형(伯氏)에게 부탁하여 그 서문을 짓게 하였으며, 다시 9년 뒤인 순조21년(1821년)에는 연천이 매 폭 마다 제화시를 지으니 70수에 이르렀었습니다. 이 글들을 화첩 속에 미쳐 써넣지 않고 있다가 다시 8년 뒤인 순조29년(1829년)에 영명위는 둘째형(仲氏)인 항해에게 부탁하여 이를 정서하여 화첩에 넣게 하고 그 전말을 밝히는 후기(後記)를 붙이도록 합니다.'
이런 내력을 가진 화첩이라면 응당 연천 형제들의 서문이나 발문은 물론 연천의 70수 제화시가 이 화첩에 합장(合裝)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금강전도첩'은 이런 것들이 하나도 합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화첩이 곧 영명위가 지녔던 화첩이자 정조어람첩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합니다. 10폭의 그림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런 글씨들이 분리될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분리시켜 영명위 구장(舊藏)이거나 정조 어람본이라는 증거를 인멸할 이유가 없으니 이 역시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금강전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원 특유의 산수기법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경산수화첩>을 일단 《해산첩(海山帖)》의 원형으로 보고 다른 문제들은 장차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의 「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표암유고 「豹庵遺稿」권4)에 의하면, 이 《해산첩(海山帖)》은 정조12년(1788년) 戊申 가을에 단원이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관동9郡을 편답하면서 그려 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76세인 표암이 44세의 단원을 그의 큰 자제인 강인(姜 亻寅) 이 부사(府使)로 와 있는 회양에서 만나 9월13일부터 17일까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생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5첩으로 꾸며진 이 '금강전도'는 10폭이 흩어질 때 장첩(裝帖)도 일부 교란된 듯 편답 순서가 곳곳에서 뒤바뀌어 있습니다. 연천이 읊었다는 제화시는 23수만 "연천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남은 시들을 찾아내는 일도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 조선 회화(繪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원김홍도필금강전도 재4첩12폭 (檀園金弘道筆金剛全圖 第四帖)<37~48> (0) | 2011.03.22 |
---|---|
단원김홍도필금강전도 제3첩12폭( 檀園金弘道筆金剛全圖 第三帖)<25~36> (0) | 2011.03.22 |
단원김홍도필금강전도 제1첩12폭( 檀園金弘道筆金剛全圖 第一帖 )<1~12> (0) | 2011.03.22 |
오원 장승업 필 잉어도(吾園張承業筆鯉魚圖) (0) | 2011.03.22 |
단원 김홍도 필 도해중선도(檀園金弘道筆渡海衆仙圖) (0) | 201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