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香 2024. 11. 18. 12:35

「釜山 福泉洞遺蹟」 

낙동강 하구의 동쪽에는 金冠國에 버금가는 유력한 勢力集團이 存在했던 사실이 부산 복천동유적 조사로 밝혀졌다. 《三國史記》에 傳하는 居柒山國, 또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의 瀆盧國의 實體가 그것이다. 

복천동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의 首長級들의 墓域으로서 무덤이 營造된 中心年代는 4~5世紀代 이다. 이들 수장급의 무덤으로서는 일직선상日字形의 副槨(무덤에 딸린 구덩이)을 갖춘 大形木槨墓가 주류를 이룬다. 무덤내에서는 鐵錠(쇳덩이)등 풍부한 鐵器類와 토기 등이 대량 埋納되어 있고, 殉葬된 人骨도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富의 축적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집중도 잘 보여준다. 

복천동유적을 영조한 勢力의 성장기반으로는 철생산의 장악과 함께 馬具나 甲胄 등에 보이는 새로운 北方文物의 수용을 들 수 있다. 4세기대의 대형목곽묘에 두가지 유형의 墓制가 混在하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당시의 김해와 동래는 각각 독립된 정치적 기반을 가지면서도 소위 釜山 · 金海式 土器의 공유나 같은 계열의 갑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호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墓壙의 규모나 유력신분을 상징하는 筒形銅器의 출토 따위로 보아 4세기대에는 금관국의 세력이 優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 廣開土王의 南征이 있고 복천동 유적에서 대형분의 主槨이 木槨墓에서 石槨墓로 변하는 5세기전반대에는 金海 大成洞 유적에서 수장급의 무덤이 급격히 소멸하고 이후 한동안 복천동의 세력이 낙동강河口의 중심세력으로 浮上하게 된다. 이는 적극적인 北方 高句麗文物의 수용이 그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釜山 福泉洞 21·22號墳 主槨 全景〉

 

〈金銅冠〉 5世期, 높이(高)21.9cm, 지름(徑)17.6cm 

부산 복천동 10·11호분 主槨

 

〈靑銅製七頭鈴〉 

 5世期, 높이(高)11.2cm, 너비(幅)11.0cm 

부산 복천동 21·22호분(釜山 福泉洞 21·22號墳

 

 

『福泉洞遺蹟의 環頭大刀』 

22號墳에서는 모두 素環頭大刀만이 출토되었으나 11호분에서는 소환두대도 외에도 三葉과 三累의 환두대도가 1점씩 출토되었다. 남부지방에서 출토된 이 형식의 환두대도 중 가장 이른 例로 보인다. 특히 三累文環頭大刀는이후 慶州의 왕릉급 무덤 또는 낙동강 東岸地域 에서 주로 출토되나 西岸地域에서는 아직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素環頭大刀〉

 

부산 복천동 21·22호분 主槨

 

 

〈 素環頭大刀〉 

5세기 길이 81.0cm, 

부산 복천동 10·11호분 主槨

 

 三葉文環頭大刀〉 

부산 복천동 10·11호분 主槨

 

〈三累文環頭大刀〉  

부산 복천동 10·11호분 主槨

 

 

『福泉洞遺蹟의 甲胄』

복천동유적의 갑주는 늦어도 4세기 후반대에는 출토되며 이때는 彎曲縱長板胄 혹은 縱長板胄와 在地의 縱長板板甲의 조합이 主種을 이루나 5세기대에는 重裝騎馬戰用의 札甲으로 대체되어지고 馬具類와 함께 그 수도 크게 증가한다. 

 

〈釜山 福泉洞 11號墳 頸甲·札甲 및 附屬具 出土狀態〉

 

〈 彎曲縱長板狀鉢胄〉

5世紀 高18.0cm, 徑43.4cm 

釜山 福泉洞 10 · 11號墳 主槨

 

〈頸甲〉

부산 복천동 10 - 11호분 주곽 

 

〈肱甲〉

釜山 福泉洞 10 · 11號墳 主槨

  

〈縱長板釘結板甲 前面〉

5世紀 高59.0cm, 徑48.5cm 

釜山 福泉洞 10 · 11號墳 主槨

 

 

〈 縱長板釘結板甲 側面〉

 

縱長板釘結板甲 前面

 

〈馬胄〉

부산 복천동 10 - 11호분 附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