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陵의 品格에 墓의 處地』(成墓)

鄕香 2020. 8. 4. 10:48

성묘는 조선 제14대 선조의 후궁으로서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주의 생모 恭嬪 金氏의 묘소이다. 

묘소로서는 그 격에 맞지 않는 석물이나 갖춤이 陵의 품격이건만 부름은 묘이다.

공빈은 선조 10년(1577년) 큰 아들 임해군과 어린 광해군(당시 2세)을 남기고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많은 공을 세웠고,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3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르셨다.

광해군 2년(1610)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어머니 공빈 김씨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올리고 殿의 이름은 奉慈라 하였으며 따라서 묘를 능으로 격상하여 성능成陵이라 하였고 그와 격을 같이하여 여타 왕릉과 같이 조성하셨다.

그 후 광해임금 15년(1623년)4월11일(음력3월12일) 능양군(인조),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의 반정군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그에 따라 임금 광해군의 생모도 왕후에서 다시 嬪으로 강등되어 비석은 치워버렸으나 석물은 온전히 그대로 남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금 광해군과 그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로 가는 갈림 길이다. 영락교회 공원묘원 입구로 들어서서 700m 정도 들어가면 도로 우측능선에 임금 光海君主의 묘가 있다. 성묘는 우측 도로를 따라 약 700m 거리에서 우측 마을 안쪽에 근접해 있다. 직선 가시거리로는 1km도 안되는 거리다. 광해 임금이 어머니인 공빈의 묘소 인근에 마주보고 묻힌 것은 광해 임금께서 임종하기 전에 생모이신 공빈 묘 옆에 장사지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안내판에서 마을로 300m 들어가면 성묘가 있다. 성묘가 위치한 산줄기 바로 끝머리에 고려 개국공신 문하시중 조맹의 묘도 있다.

  

 

 성묘 표시판 안쪽 나무들이 있는 곳은 성묘로 강등 되기전 성릉이었을 때 제실 정자각이 있었을 법한 곳으로 성묘 바로 아래 장소이다.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존호를 받고 묘에서 능으로 승격되면서 조성된 그 형태 그대로 남아 있지만 비석만 없다. 왕후王后에서 빈嬪으로 강등시켰으니 왕후의 품격으로 세웠던 비碑를 남겨둘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석물을 그대로 남겨 두었으니 인조나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은덕恩德인가 ? 이 점 고맙다 해야 되나 싶다. 권좌를 강탈하고 삼전도 치욕을 치른 머저리 인조(능양군)를 포함하여 대다수 반정공신이란 인물들도 종래는 불우하거나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것도 저희들 끼리 서로 모함하고 서로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고.. 세조 이래 그 반역심이 조선의 기개氣槪을 말아 먹었다.  

 

 

이 성묘는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의 건원릉의 양식을 충실히 따랐다. 산줄기를 훼손하지 않고 산자락 능선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성된 릉 형태로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곡장 안 가장 높은上階에는 병풍석屛風石을 두른 봉분封墳과 병풍석을 에워싼 난간석欄干石이 둘려져 있다 곡장曲墻 안쪽과 난간석欄干石 사이 兩側에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번갈아 두 쌍씩 배치하였고 봉분을 에워싼 난간석 정면에 4개의 북 모양의 고석鼓石 위에 혼유석魂游石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로 망주석望柱石이 세워져 있다.

中階에는 봉분과 혼유석魂游石과 일직선을 이루는 중앙 위치에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고 석마馬石 1필이 딸린 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下階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석물의 조형은 중국풍으로 남송 말기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역사를 떠나 내 눈은 공빈恭嬪의 성묘成墓가 아닌 공성왕후恭聖王后의 成陵을 보고 있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온전하고 견고하다. 난간석은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둘레에 설치한 돌난간으로 꽃봉오리 형식의 보주가 있는 높은 기둥은 石柱, 橫으로 돌린 팔각의 횡석주는 竹石, 석주와 석주 사이에서 죽석을 받치고 있는 장구모양에 문양을 새긴 기둥은 童子石柱라고 한다.  8각의 죽석竹石을 받치고 있는 기둥 동자석주는 허리 상하에 각각 구슬무늬 띠를 돌려 새기고 그 안에 연결고리무늬를 양감으로 새겼고  머리 턱 부분에는 앙련仰蓮을 장식했다. 난간석 안 봉분은 屛風石이라기보다는 문양 없는 판석으로 견고하게 돌렸다. 뱀이나 설치들이 봉분에 침입을 못하게 돌린 護石이라 함이 맞겠다. 광해 임금님의 효심이 보인다.

신하로서 충忠을 버리고 반정 쿠테타로 권좌를 강탈한 인조는 호란으로 도망다니기에 급급하다가 결국 삼전도 언땅에 무릎 꿇고 이마를 찧는 굴욕을 치렀지만, 광해 임금님은 왕자의 몸으로 임진왜란에 선봉에서 왜적을 맞서 싸우던 제왕의 기개가 여기 석물에서도 보인다. 臣이란, 임금이 바른 길을 걷지 못할 때 충심으로 간하고 바로 세워드려야지 신하가 아닌가? 자질있는 임금을 한 때 바르지 못하다고,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榮達을 强取하고자 작당해서 몰아내다니.. 그것이 어디 신하인가? 반역자요 저잣거리의 모리배만도 못한 종자가 어찌 아니랴!

 

 

《혼유석/魂遊石》  

4개의 고임돌(鼓石)이 받치고 있는 장방형의 혼유석은 혼(魂)이 무덤에서 나와 놀거나 쉬는 장소이다. 

 

 

《고석/鼓石》 마치 북처럼 생겼다하여 고석이라고 부른다.

장방형의 혼유석의 다리 격인 받침돌 4개는 각각 한 장의 돌을 북 모양으로 둥굴게 다듬어 상하에 평면을 두고 그 언저리에 구슬무늬 띠를 돋을새김으로 돌렸다. 원형의 옆 사면에 도깨비(귀면) 얼굴을 돋을새김하였다. 사방에서 접근하는 잡귀를 쫓는 의미를 갖고 있겠다. 

 

    

우측에서 바라본 혼유석 

   

 

《망주석/望柱石》 

 

망주석은 봉분 앞 혼이 나와 논다는 혼유석 좌우에 1개씩 세워져 있는데 이는 혼이 육신(무덤)을 떠나 외유하다 다시 육신을 찾을 때 멀리서 봉분을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의 기능을 한다는 설, 또한 왕능의 풍수적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기능적 설도 있다. 망주석을 살펴보면 중간의 한 면에 구멍이 뚫린 귀가 있다. 숙종의 원비 仁敬王后 김씨의 익릉에서는 구멍 있는 귀가 아닌 동물형상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세호(細虎)라고 부른다. 조선 전기에는 망주석에 귀耳 모양의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측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세호 양식은 조선 중기에 들어서 주로 임진왜란 이후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작은 호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혼유석 좌측에 세워진 망주석에는 올라가는 형상으로, 우측에 세워진 망주석에는 내려가는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다. 이는 혼령이 세호를 타고 세상구경을 나가는데, 위로 오르는 세호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묘소로 귀가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망주석은 외출한 혼령이 제 집을 찾기 싶게 하는 동시에 들고나는 출입로 같은 의미가 있겠다.

 

 

시대에 따라 세호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태조, 5대 문종, 14대 선조, 후궁 공빈, 21대 영조 임금 이상 4 곳의 망주석의 세호를 비교해 본다. 

 

① 태조 능침 內 망주석의 細虎 모습. (동구릉 내 건원릉) 어떤 문양도 없이 각진 모습이 마치 실絲을 감는 실패의 모습의 중간  옆구리腰部에 구멍이 뚫려 있다. 원래 있던 문양이 오랜 세월 풍화에 깎여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호나 어떤 짐승의 모습은 아니였다.

 

 

 ② 제 5대 문종 임금 능침의 망주석의 세호의 모습. (동구릉 내 현릉)

이 또한 오랜 세월 풍화로 어떤 형상인지 추측해 볼 수 없으나 건원릉의 망주석의 각진 귀耳와는 다르게 도톰한 타원형에 허리가 표현되었고 작은 동물의 형상을 떠올려 보게 한다. 태조릉의 세호와 선조宣祖 때에 세호의 변화된 것을 볼 수 있겠다. 옆구리腰部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형상 가운데 등에도 머리와 엉덩이 사이를 부드럽게 구분을 주고 꼬리가 표현되어 있다. 

 

③ 조선 제14대 선조 임금의 후궁 恭嬪의 성묘 內 망주석의 세호 모습이다. (송능2리)

두 개의 귀꽃문양을 아랫부분끼리 맞붙여 놓은 것 같은 형태이며 구멍이 뚫려 있다. 앞서 태조와 문종의 세호와 비교해 볼 때 형태에서는 문종과 비슷하지만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망주석 자체의 문양도 화려함을 볼 수 있어 어머니(生母) 공빈 김씨에 대한 광해 임금의 효심과 그리움이 엿보인다. 

 

 

④ 조선 21대 임금 영조 능침의 망주석의 세호 모습이다. (동구릉 내 원릉) 

조선 왕조 전기의 망주석의 세호와는 다르게 완연히 동물 형상이다. 신체 각 부분의 묘사가 뚜렷하고 2개의 꼬리는 각각 좌우로 말리고 그 사이로 신령스러움을 강조한 瑞氣를 표현하였다.

또한 구멍도 없다. 이로써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귀耳에서 세호細虎로 변천變遷한 과정을 볼 수 있고 표현방식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겠다. 또한 우측 망주석의 세호는 올라가는 형상이며, 좌측의 세호는 내려가는 형상이다 이는 '혼령이 세호를 타고 세상구경을 나가는데, 위로 오르는 세호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묘소로 다시 돌아옴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가 되겠다.'

 

 

(영조 능침 우측 망주석) 魂이 세호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들이 간다는 의미로 망주석을 오르는 모습.

 

(영조 능침 좌측 망주석) 魂이 세호를 타고 세상 밖 나들이를 마치고 귀가 한다는 의미로 망주석을 내려가는 모습. 

 

다시 공빈 김씨(광해 임금 생모)의 망주석 

 

《망주석 세부細部》(上)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 아래 구슬띠무늬를 돌리고 그 밑에 仰蓮의 여덟 잎면에 귀꽃문양을 새겼다. 그 아래에 두 줄의 돋을선문陽刻帶을 돌리고 그 사이에 구슬 24개가 표현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8각형 면마다 박쥐문양을 새겼다.  모두가 長壽, 多産 등 吉祥文이다. 박쥐문양은 거북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위쪽으로 두개의 다리가 표현되어 있고 머리와 양 날개죽지가 위가 아닌 아래로 향하고 있음에 나무나 암벽에 꺼꾸로 매달리는 박쥐의 자세와 몸통 표현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겠다.

 

 

《망주석 세부》(中)

중간부에는 팔각기둥 한 면에 상하로 맞붙인 귀꽃이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중간 밑으로 구멍을 양쪽에 맞뚫어 놓았는데 구멍의 쓰임은 무엇일까?  

 

 

 

《망주석 세부》(下)

 망주석 하단부 받침돌 윗면은 8각의 판석형태의 받침돌 모양의 1단을 두었고, 그 밑은 3단으로 구분된 상단과 하단은 8면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표현하고 各 8면에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중단은 상 . 하단 보다 가늘게 파낸 허리 모양의 8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좌측 망주석(望柱石) 〉

이 망주석은 八角圓當形이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장명등(長明燈)》

장명석등은 왕릉의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장명등은 상부 蓋石과 중간 火窓 부와 하부에 장대와 받침으로 구성되며 

문양은 사각 받침돌 네귀퉁이에 귀면을 사면에는 보상화문, 구슬띠, 당초문, 앙련, 안상, 복련, 귀꽃 귀갑문 등과 복발과 우주가 장식되어 있어 장명등으로서는 최상의 꾸밈을 갖추었다. 

 

 

장명등의 상륜부 개석蓋石에는 8각 지붕에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진 보개宝蓋가 있고 그 위에 구슬문양을 두르고 보륜宝輪을 올렸다 다시 구슬문양을 두른 위에 보주宝珠를 올린 형태로 우동隅棟 마루 끝 전각 8곳에 귀꽃이 새겨져 있고 蓋石(지붕) 안쪽 밑에는 처마가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8각 火舍石은 상부에는 옥개받침형식의 넓은 띠帶를 팔각八角으로 두었고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표현하고 마주하는 4면에 사각형의 맞창을 뚫었으며 화사석 바닥에는 1단의 화창 받침대를 두었다. 

화창받침아래 상대석上台石 상부에 넓은 띠帶를 八角으로 돌렸고 8각 모서리마다 기둥(隅柱)을 두고 면마다 보상화문양을 새겨 넣어으며 밑에도 위와 같은 형태의 띠帶를 돌린 아래에는 턱을 두고 앙련仰蓮을 새겼다.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으로 턱을 두어 가늘어진 허리부 모서리 8곳에 원주圓柱를 표현하고 각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다시 복련아래 8각으로 띠帶를 돌리고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두고 각 면에는 보상화문을 새겨 넣고 다시 無紋帶무늬 없는 띠를 돌렸고 8각 모서리마다 댕주撑柱를 표현한 사이 8면에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장명등 하단 다리격臺脚格인 네 귀퉁이는 귀면문鬼面文을 네 곳 측면에는 장생무늬를 새겨 놓았다. 

 

 

 장명등 하부 모서리의 네 곳에 새겨진 귀면의 형상.

    

 

《문인석/文人石》(中階)

장명등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자세로 두 손으로 홀을 받쳐들고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 왕조는 문인석을 무인석보다 한 단 더 높은 중계에 좌우로 세웠다. 

  

 

 문인석(文人石) 뒷모습. 띠에는 모란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불거진 광대뼈, 옆으로 째진 눈, 입가에 듬성한 수염 등 아첨과 권모술수를 배제할 수 없는 인상이다. 

조선 전기 文武石人에 딸린 석마石馬는 옆이 아닌 뒤에 배치되어 있다. 

   

 

 《무인석/武人石》(하계下階)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을 짚고 위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얼굴의 느낌은 왕방울처럼 툭 불거진 눈, 좁은 이마에 넉넉한 턱, 웃음을 머금은 듯 선한 얼굴은 호방함이 내보인다. 

   

  

 칼집을 허리에 차고 있는 좌측의 모습이다. 

턱과 구렛나루 귀에 표현된 거친 수염과 털은 무인의 기개가 서렸고 갑주 어깨에 새겨진 귀면은 엄숙함이 묻어난다. 

     

 

갑주에는 아름답지만 화사하지 않은 누빔 무늬가 위엄을 더해 준다.

  

 

하계下階에는 다른 석물 없이 석마石馬가 딸린 무인석武人石만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능침 좌 우측 난간석과 곡장사이에는 잡귀로부터 능침을 보호하는 동물이 배열되어 있는데 앞에서부터 석양, 석호, 석양, 석호 이다. 

  

 

 석양石羊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을 지닌다.

 석호石虎는 잡귀로 부터 능침을 지키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 석양과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의미로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성묘가 아닌 어느 왕릉에 버금가는 성릉을 접한 기분이다 보존도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어서 감사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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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1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