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금관가야국 구형왕릉(仇衡王陵)山淸

鄕香 2015. 11. 5. 13:10

새벽을 가르고 천릿길을 달려간 산청의 왕산자락의 골짜기, 덕양전(德讓殿)을 지나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오르는 길은 푸르스름한 아침이내가 서려 기척 없는 호젓한 길을 더욱 스산하고 시리게 한다.

방장산(지리산)자락의 왕산은 방대한 지리산의 동북쪽 끝으로 금관가야국 시조 김수로(金首露)왕의 태왕궁지(太王宮址)이다. 서기199년 김수로왕은 첫째 왕자인 거등(居登)에게 양위를 한 후 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왕후와 함께 移居하고 호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 왕후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라 하고, 궁은 태왕궁, 산은 태왕산으로 명했다고 전한다. 수로왕은 이곳에서 38년간 살다가 나라를 다스린지 158년만인 기묘년 3월23일 서거하였다. 이후 300여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금관가야 마지막 왕 제10대 양왕(구형왕)이 금관가야를 신라에 양위한 후 태조 수로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왔다. 구형왕은 이곳 태왕산에 수정궁을 짓고 4년간 칩거하다 서거하니 시호를 讓이라 했다.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의하면 "산양현 서쪽 모퉁이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에는 왕릉이 있다. 그러므로 왕산이라 하였다. 무릇 陵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능침이고, 태자 대각간 서현舒玄과 증손 유신(庾信)이 왕대에 수로왕 사당을 추봉하고 절에 구형왕사를 세워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라고 쓰여 있다. 김유신 대장군은 이곳에서 묘우(廟宇)를 세워 7년간 시묘(侍墓)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다. 가락국 태왕산에서 유래가 되어 왕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太廟의 옛 터와 구형왕릉 그리고 김유신 의 웅지의 역사가 깃든 금관가야의 고적지이다.

 

 

<왕묘유지비/王廟遺址碑>

이 비는 고종27년 태왕궁(수정궁)이 노후하여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이 비를 세웠다가 1929년 대홍수로 축대가 무너져 능 아래인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덕양전에서 구형왕릉 오르는 길 사이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왕묘유지비 세부 중 일부/王廟遺址碑 細一部>

청석에 새긴 비문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문신 조진관(趙鎭寬)이 가락(駕洛國)의 옛 터전을 돌아다니다가 수로왕릉을 배알하고 초선대에서 거등왕(居登王 제2대 왕)의 초상에 절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머뭇 세월을 보냈다. 가락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왕의 부자가 몽매한 상태를 열어젖히고 山海에 웅거하여 공을 쌓고 기적을 베풀었으니 천고의 영웅이다. 왕위를 계승해 내려오다 10代 구형왕(仇衡王)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그 후예가 金海 金氏가 되었으니 김해는 옛 가락의 땅이다. 그 서쪽으로 三百리 거리에 山淸縣이다. 縣의 王山寺에는 돌을 높이 쌓아 놓은 것이 있는데 옛 부터 대왕릉이라 칭했다.. "(중략) 따라서 이 碑는 조선 후기 文臣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 비문을 짓고 세운 것이다. '조진관'은 본은 풍양豊壤 , 號는 가정柯汀으로 1762년 司馬試에 합격한 후 세자익위사, 홍문관제학, 광주부윤, 돈령부도정,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孝文公이다. 

 

 

주차장에서 100m 정도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니 구형왕의 돌무지 石陵과 그 일대의 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홍살문과 구형왕릉, 석축 위 고즈넉이 앉아 있는 기와지붕의 건물 한 채.. 현판은 '讓陵閣'이다.  

 

 

계곡 옆 산기슭에 삼단의 높은 석축을 쌓고 터를 마련하여 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방을 둔 세 칸짜리 집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올린 '호릉각/護陵閣' 즉 구형왕릉을 보호하는 이들의 처소라는 의미를 담은 현판이 있는 건물이다.

 

 

구형왕陵으로 들어서는 솟을 삼문이다. 가운데는 혼령만 다닌다는 神門이다.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의 능으로 45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아 만든 기단식 석단으로 4면이 일곱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 5단에는 사각형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 총 높이 7.15m의 割石陵이다. 구형왕릉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제 31권 경상도 해동역사 속집 제3권 地理考, 大同地理紙, 朝鮮寰與勝覽, 조선시대 문인 홍의영(洪儀泳1750~1815),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왕산사라는 절에서 전해져오는 "왕산사기"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라고 되어있다. 홍의영 왕산심릉기에 의하면 "산양현 서쪽 모퉁이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는 왕릉이 있다. 그러므로 왕산王山이라 하였다. 무릇 陵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능침이고, 태자 대각간 서현舒玄과 종손 유신庾信이 왕대王臺에 수로왕 祀堂을 추봉追封하고, 절에 구형왕사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다.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 )은 겸지왕(鉗知王 재위 492~521)의 아들로 서기 521辛丑년 가락국 제10대 왕으로 등극하여 12년간 금관가야를 다스리다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신라에 나라를 양위하였다. 신라 법흥왕은 금관국 전체를 식읍지로 주었으나, 구형왕은 동생 구해仇海에게 나라를 맡기고 왕은 태자와 비빈을 거느리고 지품천知品川 방장산 자락 태왕궁太王宮(시조 수로왕이 아들 거등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왕비와 이곳에서 노후를 보낸 곳 )에 은둔하여 옥전玉田위에 사당을 창건하고 시조를 추모하는 곳으로 삼아 지내다 4년 후 승하하니 유언에 따라 여기에 장사지내고 할석으로 능(割石陵)을 조성하였다.  

 

 

석물은 조선 후기 양식이 다분하며 좌우로 각각 문인석상, 무인석상, 석수가 있는데 우측의 석수는 수사자, 좌측은 암사자로 추측된다.  

 

 

구형왕릉(仇衡王陵) 우측 모습이다. 능은 언덕을 따라 7개의 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물방울원형의 봉을 두었으며 5단 정면에 감실(龕室)을 두었다.  

 

 

봉분위는 평평하고 둘레는 전면은 반듯하고 앞은 넓고 뒤는 다소 좁아진 타원형이다.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둘려 진 곡장(曲墻) 또한 돌로 쌓은 돌담이다.

 

 

구형왕릉 좌측 모습이다. 7단 위에 조성된 봉은 물방울형이다.

 

 

이 능은 산청군 왕산 아래 일곱째 천간 자리(庚坐) 언덕에 있으며, 왕의 이름은 구형(仇衡)이고, 양(讓)은 시호(諡號)이다. 살아서는 이름을 부르다가 죽어서는 시호를 부름은 대체로 질박하여 문채(文彩)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문헌에 전해 온다. 1971년 2월9일 국가사적지 제21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구형왕릉 좌측에 위치한 호릉 과 대문의 모습.

 

 

《호릉각/護陵閣》

陵을 보호하는 사람(陵參奉)들이 머물며 守職所와 같은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라 하겠다.

 

 

출입을 금한 곳이다. '호릉각' 대문을 마주한 옆 다른 터에 있으며 정확히는 모르나 食間 건물이 아닌가 싶다.

 

 

《가락국양왕덕양전/駕洛國讓王德讓殿》

덕양전은 금관가야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과 계화왕후(桂花王后)의 신위(神位)와 존영(尊影)을 봉안한 곳이다. 구형왕의 존호는 양(讓)으로 서기 521년 금관가야의 10대 왕위에 올랐으며 세종, 무덕, 무력 세 아들을 두었다. 신라의 명장인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이 무력의 아들 서현(舒玄)의 아들이니 증손이고, 신라 제 30대 문무왕 법민(法敏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원자)이 5대 외손이다. 서기 532년 금관가야 구형왕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서 백성을 구하고자 스스로 신라에 나라를 선양(善讓)한 후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궁지인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移居하였다. 始祖王의 태왕산은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의 이름을 '수정(水晶)'으로 편액하고 4년간 은거하다 세상을 달리하자 군,관,민에 의해 돌을 쌓아 割石陵으로 모셨다. 비록 나라는 내어주었으나 백성을 사랑했던 임금의 善政으로 자손이 크게 번성하니 왕의 음덕이 깊이 흐르고 추모하는 정성이 특별하여 천 수 백년을 이어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덕양전은 구형왕의 증손인 김유신 대장군이 왕릉 옆 터에 단을 쌓아 왕의 침전이었던 수정궁을 옮겨짓고 祭香을 받들게 되니 그 수정궁이 지금의 덕양전의 모태가 된다. 서기 676년 신라 문무왕(文武王626~681)은 "나는 구형왕의 5대 외손이다. "중사를 파견하여 사당과 능묘를 단장하고 절을 중수케 하며 왕릉 부근의 땅 30경을 봉하여 제사를 지내는 세경(稅經)으로 쓰게 하라."는 기록으로 왕의 제례가 문무왕 16년에 성대하게 봉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이전 이미 구형왕의 신위가 김해 수로왕廟에 배향되어 있었음을 문헌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대궐의 동쪽 평지에 빈궁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 길이며 둘레가 3백보인 그곳에 사당을 세워 수로왕廟라 했으며, 2대 거등왕에서부터 구형왕까지를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정결한 祭典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또한 "신라 30대 문무왕(法敏) 용삭(龍朔) 元年 辛酉(661년)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락국 시조의 10세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신라)에 양위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과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과 그의 아들 서운갑간(庶云匣干)의 딸/문명왕후(文明王后)께서 나를 낳으셨다. 그러므로 수로왕은 나에게 15대祖(外祖)가 된다. 나라는 이미 없어 졌으나 그 묘(廟)가 아직 남아 있으니 宗廟에 합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라, 이어 사자를 보내어 묘에 가까운 上田(좋은 전답) 30境을 내려 제수를 마련할 토지를 삼으니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부속 시켰다... 중략 (三國遺史 駕洛國記)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하여 왕묘가 황폐하여졌음에도 여러 왕대의 역사를 거듭해 오면서 구형왕의 사당인 왕산사 복원과 능묘의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전란으로 제향이 중단되었다가 정조 22년(癸亥 1798년)에 영남유생 민경원에 의해 심릉사실(尋陵事實)이 이루어지면서 구형왕의 전각이 중건되어 수정궁에 신위를 봉안하고 제례를 올렸다. 이 수정궁은 고종 15년(戊寅 1878년)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숭선전(崇善殿)이 賜額됨을 계기로 殿號를 덕양전으로 개칭하였다.

1928년 현재의 장소로 옮겼으며 두 차례에 걸쳐 추모재(追慕齎), 왕산숙(王山塾), 관리사(管理舍)를 중수하고 2014년 가락국역사관이 건립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방문한 2015년 11월2일에도 여러 곳을 보수하느라고 통제되어 안은 둘러볼 수가 없었다. 매년 봄(陰3월16일), 가을(음9월16일) 두 번에 걸쳐 봉향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삭.망 분향례를 올린다.

 

〈외삼문/外三門〉

 

홍살문을 지나 누각을 겸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일직선으로 해산루가 있다. 해산루 전 우측에 구형왕신도비가 있다. 해산루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수정궁으로 들어가는 연신문(延神門)이리라 담장 너머로 보건데 담장은 3단식으로 외삼문 담장, 내삼문 담장, 연신문 담장으로 구분하여 그 담장 구분 안에는수정궁으로 가는 길 양 편으로 건물들이 수정궁 앞에 시립하는 모양으로 세웠져 있다. 수정궁(水晶宮), 영정각(影幀閣), 안향각(安香閣), 왕산숙(王山塾), 동제(東齎), 화수정 서재(花樹亭 西齎). 만동문(萬同門), 추모재(追慕齎), 등이 그것이다.  

 

《해산루/海山樓

해산루는 넓은 바다에 우뚝 선 山이라는 뜻으로 만백성의 지존인 군왕이 백성을 굽어 살핀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가락국구형왕신도비/駕洛國仇衡王神道碑》(細部)

 

 

이 신도비는 가락국(금관가야)마지막 王 구형왕의 공적을 기록한 비로 비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름은 구형(仇衡)이고, 양(讓)은 그의 시효이다. 모든 성인은 한 마음인데 통달한 덕은 세 가지이니,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아우른 사람을 오직 왕께서 보겠네. 집이 훼손되어 글을 얻으니 그 知覺이 신과 같도다. 백성을 사랑하여 나라를 버리시니 지극한 어짐이로다. 물러남의 때를 기다리지 않으니 그 용기를 누가 당하겠는가? 착함으로써 복을 보답함은 저 하늘에 밝게 빛나도다. 뽕밭이 여러차례 바다로 변해도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리라. 산중의 승려도 임금의 백성이라 받들어 모심이 精潔하도다. 음이 가고 양이 돌아오니 상서로운 자손들이 왕을 제향하네. 두 번째 정일에 제사하고, 남릉에도 함께 享祀하도다. 제도를 바꾸고 모양을 달리하니 만세의 명당이라, 福祿의 길이 이어져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기묘년 중추일에 가선대부 이조판서 兼 동지겸연 의금부 춘추사관 성균관사 규장각 직제학 시강원 검교보덕 驪興 閔丙承은 삼가 글을 짓고, 가선대부 규장각 부제학 延安 李丙觀은 삼가 전서를 쓰고, 숭록대부 전판돈령원사 海平 尹用求는 삼가 글을 쓰다. 碑文에 의하면 이 碑는 대한제국 고종 16년(1879년 己卯年) 추석(음력8월15일)에 세웠다.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521~532)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10세손으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가락국 9대 겸지왕(鉗知王491~521)의 아들로서 서기521년 왕위에 올랐다. 휘(諱)는 仇衡, 존호는 讓으로 왕후는 桂花王后이고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을 두었다. 증손으로 삼국통일의 주역 흥무대왕 김유신과 5대 외손 신라 제 30대 문무대왕(諱 법민)을 두었다. 재위 12년 동안 민본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린 성군 양왕(구형왕)은 전쟁을 피하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나라를 신라에 양위한 후 계화왕후와 함께 가락국 시조의 廟를 모시고 태왕궁이 있는 지품천 방장산자락 왕산으로 들어오셨다. 이곳 왕산의 태왕궁에 당도한 왕은 시조대왕의 태왕궁을 수정궁으로 편액한 후 수년간 은거하시다 영면하여 산자락 경좌의 언덕에 모셨다.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외삼문담장과 해산루문 사이 50m 정도의 공간이 있고 해산루 우측 담장 앞에 구형왕신도비가 있다.

 

 

후손들의 기념비 또는 찬양비석들.

 

 

 

아래 사진들은, 덕양전 내의 일부 건물들을 수리하느라고 문을 개방하지 않고 있어 덕양전 내부 관람을 할 수 없어 부득이 건물의 사진을 복사하여 기재한 것이다. (아래 사진자료, 駕洛國10代仇衡遺蹟地史料集)

 

(수정궁/水晶宮)

讓王(구형왕)의 寢宮으로 원래는 王臺 아래 왕릉 위에 있었으나 조선조 정조 22년(癸亥 1798년)에 영남유생 민경원에 의해  尋陵 사실이 이루어진 후 왕릉 옆으로 이건하여 왕의 제사를 드리는 전각으로 사용하였는데 1928년 홍수로 허물어져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

 

(영정각/影幀閣)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안향각/安香閣)

안향각은 제례에 쓰이는 香, 燭, 祭器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연신문/延神門)

수정궁의 정문으로 神을 맞이하고 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닫혀 있는 가운데 문은 神이 다닌다는 神道門이다. 1843년 김해부사 송지양이 지은 연신문 上梁文에 보면 "우뚝 하도다! 신령이 머무시는 곳에 정성들여 제사드릴 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빛나도다! 祭閣에 신을 맞이하는 장소가 생긴 것이다."라고 축원한 기록도 있다.

 

(동제/東齊)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몸을 깨끗이 씻고 종사의 중의를 논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1799년 陵監 허기가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崇善展)의 동재를 건립했을 때 지은 상량문을 보면 "어라워! 대들보를 동쪽에 올린다. 삼차강(三叉江)과 칠점산(七點山)이 곧바로 통하는구나, 천년 전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은 그대로 있어 후손들이 단합하여 높은 기둥을 세우네."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화수정 과 서제/花樹亭 · 西齊〉

하나의 건물에 방과 정자를 합성한 건물이다. 지면이 높은 한쪽은 두 개에 방을 두고 지면이 낮은 다른 한 쪽은 누각의 형식으로 지었다. 

화수란 만개한 꽃나무를 말하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많은 가지가 나와 수많은 꽃을 피운다는 뜻으로 여기서 화수정은 일가 종친들이 모여 배우고 의논하는 정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동문/萬同門〉

만동문은 萬派同源 萬枝同根이라는 뜻에서 취한 것으로 '수만갈래이지만 근원은 같고 수만가지이지만 뿌리는 같다.'라는 뜻으로 김해의 본관을 가진 자손들의 번창을 뜻하며 문의 빗장을 열고 당기는 열쇠를 법칙으로 여기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

 

〈추모제/追慕齊〉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모여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드리며 제향을 받드는 준비를 하는 장소이다. 원래 추모재는 능침 아래 있었으나 1928년 홍수로 유실되고 1930년 봄, 현재의 신도비각이 있는 자리에 낙성을 하였다가 1988년 덕양전 중수 때 지금의 자리에 건립하였다.

왕산숙/王山塾〉

건물 우측에는 덕양전 참봉실과 좌측에 능참봉실을 배치하여 참봉의 집무실과 접견실로 사용하고 있다.

 

 2015년 11월4일 수요일. <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