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호생관 최북 필 산수도(毫生館崔北筆山水圖)

鄕香 2011. 12. 29. 14:12

 

이 그림은 최북이 1748년에 이성린과 함께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남긴 작품으로 구도와 공간처리는 조선 초기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수지법(樹枝法)에서는 남종화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필치와 간담한 취향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우측 빈 공간에 " 戊辰季夏 朝鮮國居其齋七七寫"라는 관지가 적혀 있습니다.

최북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거기재(居基齋)·성재(星齋)·삼기재(三奇齋)·기암(箕庵)·기옹(奇翁)·좌은(坐隱)·반월(半月)·호생관(毫生館). 아버지는 계사(計士) 상여(尙餘)이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이익(李瀷)·이용휴(李用休)·신광수(申光洙)·신광하(申光河)·정범조(丁範祖)·이광사(李匡師)·강세황(姜世晃) 등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사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자연주의의 실천과 함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는 등 시·서·화를 겸비한 조선 후기의 본격적인 직업화가로서 활약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박지원(朴趾源)·유련(柳漣)·남공철(南公轍) 등 북학적(北學的) 성향을 띤 지식인들 및 여항시인 이단전(李亶佃), 화원 김홍도(金弘道) 등과도 교유했습니다. 키가 몹시 작았던 그는 매섭고 괴팍한 성격과 오만하고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狂生)으로까지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서상기 西廂記〉·〈수호전 水滸傳〉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경했다고 하며,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沈師正)·정선(鄭歚) 다음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유작들은 산수·화조·초충(草蟲) 등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당시 사람들은 '최메추라기'라고 불렀다고도 하나 산수화에 가장 능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심사정과 강세황의 남종화풍을 토대로 보다 치졸한 듯하면서 소박하고 정감어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생관 최북 필 산수도(毫生館崔北筆山水圖)

조선시대(17세기) / 종이에 묵그림(紙本水墨)128.2×55.4cm /個人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