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外國)/알타이(Altai) 문명

고 투르크(古 TURks) 문화

鄕香 2011. 11. 1. 00:07

 

투르크의 주업은 유목이었다. 그들은 수 많은 무리의 소와 말, 양을 길렀다. 알타이 지역에서는 양 말 이외에 긴털소도 길렀다. 

기장과 맷돌이 고대 투르크 고분에서 발견되며 몇몇 문헌기록에서도 이들이 농경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냥은 주로 남부 시베리아 특히 산악지대 부족들의 생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일반인들은 담비나 다람쥐의 가죽을 세금으로 내기도 하였다. 알타이지방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붉은사슴, 산양, 큰뿔사슴 등의 사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의 주요 사냥도구는 활이었다. 남부 시베리아에서는 철광석의 원재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산지 채광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철광석들은 진흙으로 된 용광로에서 제련되었다. 알타이 대장장이는 여기에서 얻어진 쇠로 다양한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을 제작하였다. 그들은 외날의 도(刀)와 양날의 검(劍), 구멍이 뚫려 소리나는 삼익(三翼)의 효시(嚆矢)를 제작하였다. 알타이인들의 특별한 무기는 강인하고 약간 날이 휜 기병용 칼이었다. 대장일을 하기 위한 쇳물 도가니는 알타이 대장장이의 대표적인 도구였다. 이러한 전통은 알타이 지역에서 18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철제 도구 중나무를 베거나 여러 가지 목제품을 만들 수 있는 도구인 자귀형 도끼는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칼은 도구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화살통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다. 이것은 허리띠에 걸 수 있는 철제 고리를 갖고 있었다. 이들 유목민 특권층을 위해 각지의 대장장이들은 은제 그릇을제작하였다. 보석은 주로 허리띠와 마구에 장식되었다. 과판과 같은 이러한 장식물의 특징은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장식들은 마치 식물의 일부분을 상징화한 것처럼 조각한 식물형장식의 과판도 있다. 여러 조각과 나무 문양의 작은 조각판도 있다. 

토기는 비교적 원시적이다. 토기들은 상당히 조잡한 단지 모양과 그릇 등이다.  가장 널리 제작된 가내수공업 제품은 두꺼운 펠트와 가죽제품 등이었다. 6-8세기 고분의 발굴에서 출토되는 두꺼운 펠트천은 얇고 견고한 것에서 두껍고 무거운 것까지 여러 종류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유르타(Yurta)의 덮개용이면서 의복이나 침대도 만들었다. 일상생활의 필요에 의해 목재 가공기술이 발전하였다. 유르타의 목재부분, 말안장, 마차의 기본 골격,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가재도구, 접시, 화살 대, 칼과 채찍의 자루 등은 나무로 만들어 졌다. 자작나무껍질은 액체를 담는 용기나 화장통을 만들기 위해 널리 쓰였다. 활에는 아교를 칠하고 활집은 자작나무껍질로 씌웠다. 어떤 종류의 그릇들은 가죽을 꿰매어 만들었고 동물뼈와 사슴뿔로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칸국(汗國)의 지배집단과 여러 부족의 지배자들은 중국과 교역도 하였다. 이들 교역은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다. 그들은 가축과 모피 가죽을 비단과 금으로 교환하였다. 알타이 투르크의 주요 주거 형태는 돔형의 유르타(Yurta)라는 집이었다. 격자 모양의 나무골조 위에 두꺼운 벨트천으로 덮은 유르타에는 바닥 중앙에 화덕이 있고 출입구는 동쪽에 두었다. 그외에도 목재 주거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투르크인은 가죽, 모피, 두꺼운 벨트와 거친 재료로 만든 긴 치마 같은 옷을 입고 살았다. 알타이의 투르크고분 발굴에서는 부유층의 털코트가 비단으로 덧쌓인 형태로 종종 발견되었다. 

투르크의 전사들은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투구를 썼다. 또한 성인 남자의 장신구는 과판세트를 갖춘 가죽허리띠였다. 

주요 운송수단은 말이었다. 말안장은 나무로 만들고 골제 장식판과 쇠로 된 발걸이를 달았다. 

투르크 가족제도는 비록 여성들이 비교적 자유롭고 심지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는 하였지만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였다. 친족 체계는 분지적이었다. 재산의 불균등은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경제적 불균등은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서도 심화되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은 카간(可汗)에 복속된다. 그의 보좌역들은 왕위 계승자들과 군대의 지휘관들이었다. 관리는 28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시에 친족제도와 유목민들의 부족적 분할체제가 국가의 특별한 특성이었다. 

투르크의 일반적인 문화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들은 아마 소그드인(Sogdian)의영향으로 아르메안(Aramean)알파베트에 기초하여시베리아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570년경 투르크어로 몇 권의 불경이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고유한 장식적인 응용예술을 갖고 있었다. 발굴된 고분에서는 여러 가지의 금속, 뼈, 가죽, 펠트 등으로 된 물건이 출토되었다.

 

<은제 거울>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800년) / 지름9.8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13호 고분

 

<은제 잔>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높이8.0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

 

 

<금동 허리띠장식>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左上)5.5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1 . 

 

 

<은제 띠장식>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700-900년 / 길이 1.4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

 

<은제 말굴레장식>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700-900년 / 길이(下)2.4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

 

 

 <금제 말굴레장식>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5.5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

 

 

<철제 등자>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높이 20.8cm /산지 알타이 우스티드.

 

 

 <굴레 안륜>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높이 21.0cm /산지 알타이 졸링1.

 

 

 <골제 안륜 띠고리>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6.0cm /산지 알타이 졸링1.

 

                                                                                                   <細部> 

<철제 금 상감 명문대도>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 86.0cm /산지 알타이 졸링1.

 

 

<쇠살촉>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右)10.8cm /산지 알타이 보로탈.

 

 

<쇠망치.자귀>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右)14.0cm /산지 알타이 보로탈.

 

 

<철제 재갈>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길이(右)14.5cm /산지 알타이 보로탈.

 

 

<철제 안륜띠고리>  

古 투르크 시대(쿠라이 문화) 기원600-900년 / 높이 6.0cm /산지 알타이 보로탈.

 

<골제 활부속구>  

古 투르크시대(쿠라이 문화) 기원700-900년 / 길이(右上)19.0cm /산지 알타이 아크-알라하Ⅲ쿠르간2

 

 

<골제 활부속구>  

古 투르크시대(쿠라이 문화) 기원700-900년 / 길이(右)7.0cm /산지 알타이 아크-알라하Ⅲ쿠르간2

 

 

<철제.골제 허리띠장식>  

古 투르크시대(쿠라이 문화) 기원700-900년 / 길이(띠고리)4.0cm /산지 알타이 아크-알라하Ⅲ쿠르간2

 

 

<은제 잔>  

古 투르크시대(기원600-900년) / 높이8.5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백동 거울>  

古 투르크시대(기원900년대 초) / 지름7.0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철제 마구-재갈-안장띠고리-등자>  

古 투르크시대(기원600-900년) / 길이(등자) 14.0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철제 칼-화살촉-자귀>  

古 투르크시대(기원600-900년) / 길이(자귀)12.0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금동제 귀걸이>  

古 투르크시대(기원700-900년) / 길이4.0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골제 띠고리>  

古 투르크시대(기원700-900년) / 길이(오른쪽)6.6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토제.석제 머리장식>  

古 투르크시대(기원700-900년) / 지름(左下)4.0cm /산지 알타이 우코크 평원 베르텍34호 고분.

 

석상은 사람을 묘사한 것이며, 이들은 보통 제의(祭儀)를 위한 작은 돌울타리(祭壇)의 동쪽에 얼굴을 동쪽으로 하여 세웠다. 돌에 새겨진 이들 인물상에는 얼굴모습, 세부적인 의복, 머리장식, 장식판이 붙은 허리띠와 무기를 포함한 허리띠 부착물 등이 표현되어 있다. 그들 투르크족의 샤머니즘적 믿음을 고려해 볼 때 이 죽은 자의 석상은 제사의식이 이루어진 시기에 만들어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투르크 전사 석상> 古 투르크 시대(700-900년) / 높이 (左)99.5cm (右) 96.3cm / 알타이 지역

 

 

<투르크 전사 석상> 古 투르크 시대(700-900년) / 높이 (左)128.3cm (右) 93.4cm / 알타이 지역

 

 알타이 지방의 투르크인들의 주요한 예술세계는 사냥하는 장면, 여러 동물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암각화에서 볼 수 있다. 투르크인들은 샤머니즘을 신봉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에는 약간의 토템신앙적 관념을 가졌었다. 그들은 늑대를 모든 동물의 조상으로 간주하였다. 570년대에 이미 토보(Tobo)칸 치하에서 부터 불교를 투르크인 속에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 알려지고 있다.

투르크인의 매장의례는 시대가 달라지면서 변화를 겪게된다. 초기에는 화장(火葬) 후 매장(埋葬)을 하였으나 후기에는 화장이 아닌 단순 매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의 무덤은 깊이가 그다지 깊지 않고 말들이 부장되었다. 무덤 상부에는 돌로 된 분구가 설치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피장자만이 묻힐 때도 있었다. 840년 키르기스인들은 위구르를 격파하고 알타이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알타이의 투르크족들까지 그들의국가에 편입시켰다. 이 사건은 일부 격리된 부족집단의 특징은 여전히 전과 동일하게 남아 있었지만, 상이한 여러 투르크족 집단의 보다 밀접한 상호교류와 문화의 균질화를 촉진시켰다. 

알타이 투르크족은 그리 높지 않은 적석분구 아래에 여전히 시신과 말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9-10세기에 와서는 오히려 말을 순장하지 않는 풍습이 넓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피장자의 머리도 북북동 방향으로 놓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분에서는 말의 머리와 다리뼈가 함께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박제한 말을 묻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키르기스인들의 알타이 지방으로의 세력 확대는 이 지역의 화장묘 출현에 의해 증명된다. 결국 투르크족의 알타이산록 삼림-스텝지대로의 이동은 소위 스로스티키(Srostki)문화를발생시켰다. 이 새로운 투르크계 종족의 이주자 이외에도 그들에 의하여 동화된 지역적 우그로-사모디안(Ugro-Samodian)부족들도 스로스티키문화의 형성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