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유 필 산수도(小癡許維筆山水圖)
소치(小癡) 허유(1809-1892)는 처음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로 개명(改名)하였습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 관지(款識)에는 수치(叟痴), 노치(老癡), 칠십노치(七十老癡), 팔질노치(八耋老癡), 석치(石癡), 연옹(蓮翁) 등을 사용했습니다. 자(字) 마힐(摩詰)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입니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1568-1662)의 후손이며, 아버지 허각(許珏)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1809년(純祖9年)에 태어났습니다. 벼슬은 知中樞 였으며, 그는 추사 김정희를 師事하고, 고개지(顧愷之:東晋의 화가344~406), 元의 黃大癡를 비롯하여 前世 名人의 眞蹟을 연구하여 그 진수(眞髓)를 터득함으로써 산수, 인물, 매화, 대나무, 노송 및 괴석 등을 다 잘 그렸으며 특히 산수와 큰 폭의 노송에 특별히 능했습니다.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소치는 詩, 書畵의 三絶로서 19세기 한국문화의 한복판을 구름처럼 지나갔습니다. 1835년 그는 해남 恭齋 尹善道 遺宅을 방문하여 공재화첩을 보고 그림을 수업하게 되어 그곳에서 가까운 大興寺를 찾아가 초의대사(艸衣大師)<초기 茶山 丁若용 문하에서 수학, 金秋史 . 申威堂 등과 교유가 깊고 특히 茶道에 조예가 깊음>의 지도를 받았습니다.초의대사 소개로 31세 때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로 들어가게 되어 그때부터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였습니다. 다시 추사의 소개로 35세 때에는 右水使 申觀活의 幕中에 있다가 그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영의정 權敦仁의 집에 머물면서부터 憲宗쎄 그림을 그려 올리게 되었습니다.憲宗이 승하하자 다시 酉山 丁學淵에게로 갔다가 상경하여 閔升鎬 金興根, 鄭元容 댁을 周遊하며 서화를 품평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후 大院君 . 閔泳翊 등과 상봉하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소치의 나이 70세이후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화필 하나를 들고 당시 藝苑을 왕래했던 것입니다.
소치의 자서전인 「小癡實錄」에서 "石坡(대원군 이하응)와의 結契記"에 보면 대원군은 蘭幀을 그리고 겸해서 詩 한 수를 써주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소치는 書畵의 大方家」라고 칭찬하고 또한 「平生에 맺은 인연이 蘭草처럼 향기롭다 」.
소치 허유 필 산수도(小癡許維筆山水圖)
朝鮮時代 / 許維(1809~1893) / 紙本淡彩 縱154× 橫38cm / 個人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