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생관 최북 필 산수도(毫生館崔北筆山水圖)
崔北은 조선화단에서도 기행(奇行)과 주벽(酒癖)으로 이름난 화가입니다. 그는 어떠한 형식이나 틀에 갇히기를 싫어하고 자유분방하게 畵興이 미치는 대로 개성적인 표현을 즐겼습니다. 화목도 다양하요 산수(山水), 인물(人物), 영모(翎毛), 괴석(怪石), 화훼(花卉) 등에 걸쳐 無所不能했으며 특히 산수에 있어서는 남종화풍이 깊었습니다. 又峯 趙熙龍의 「 崔北傳」에서 그는 중국 송대의 末期 4大家(黃公望.吳鎭.倪瓚.王蒙)의 한 사람인 黃大癡(황공망의 호)를 매우 칭찬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의 산수화풍이 南畵的이라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 그림의 구도는 남화풍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平遠山水로서 視感을 안정시켜주고 있습니다. 그의 호방한 그림치고는 비교적 간결하고도 정밀한 필치를 구사한 온화하고 유연(悠然)한 작품입니다.
최북(崔北, 1712 ~ 1760)은 조선 숙종 . 영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 또는 호생관(毫生館)인데, 이름인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서 자를 칠칠(七七)로 짓고, 호는 붓[毫] 하나로 먹고 산다[生]고 하여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답니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拘碍)받은 곳이 없었으며 남화(南畵)의 거장인 심사정(沈師正)과 비길 만한 인물입니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奇行)이 많았고 폭주가이며 여행을 즐겼습니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습니다. 칠칠거사(七七居士)로 알려진 많은 일화(逸話)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49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호생관 최북 필 산수도(毫生館崔北筆山水圖)
朝鮮18世紀 / 崔北 1712~1786 / 紙本淡彩 /縱 28cm × 橫 25.5 cm /金炳三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