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원삼국 三韓時代(馬韓.辰韓.弁韓

영산강의 고대문화 (墳丘墓 . 遺物 各種.)

鄕香 2011. 1. 20. 19:56

原三國時代 후기 또는 삼국시대 초기가 되면 榮山江流域에서도 새로운 문화요소의 유입으로 墓制의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支石墓나 積石木棺墓가 소멸하고 대신 土壙墓나 甕棺墓가 유행하게 됩니다. 초기의 토광묘는 墳丘의 유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지만 곧자연지형을 이용한 自然墳丘나, 장타원형, 고구마형 등 異形의 低墳丘墓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이들 분구묘는 둘레에 周溝가 위치하여 墓域의 범위를 區劃해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른 시기 고분인 나주 마산리 및 화순 용강리유적의 토광묘는 출토된 토기의 양상이나 소형 옹관묘와의 封土내 공존현상으로 보아 서울-충청지역과 유사한 文化內容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반도 중부 및 서남부지역이 문화적으로 동일한 단계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영산강유역에서 분구묘는 萬家村 . 萬樹里 4號墳, 新燕里 9號墳에서 알 수 있듯이 대형의 土壙木棺墓(이하 土壙墓)가 매장주체부로 등장하는 시기에 조영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만수리 4호분은 周構가 달린 장타원형長楕圓形의 低墳丘墓인데 묘역의 중심부에 토광목관묘가 배치되고 있으며, 옹관은 주구의 外廓과 중심부라 하더라도 토광의 어깨선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옹관이 토광묘에 비해 시기적으로 後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러한 例는 만가촌과 신연리 9호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영산강유역에서 墳丘化의 진행은 토광묘단계로 보여지며 그것이 대형화하지 못하고 매장주체가 옹관묘로 이동된 뒤 巨大化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萬家村墳丘全景>

 

토광묘(土壙木棺墓)의 부장토기는 실생활용기 중에서 전통성이 깊은 토기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른 시기에는 低火度에서 燒成된 圓底壺와 深鉢의 共伴關係가 주목되며, 타날打捺된 문양으로는 주로 垂直集線文과 橫沈線이 있고 格子文도 적은 편은 아닙니다. 

4세기를 전후하여 短頸壺, 兩耳附壺, 廣口壺가 등장하며 후기에 이르면 長頸壺, 有孔廣口小壺 등도 埋納됩니다. 

 

<토제단지>높이(右)18.2cm/나주 다도 마산리 토광묘 출토유물

 

<토제 단지.심발>높이(左)18.4cm/화순 도암 용강리 토광묘 출토유물.

 

『萬家村古墳群』

함평 월계리의 낮고 편평한 舌狀臺地에 위치하는 고분군으로 현재 9기가 남아 있습니다. 부분적인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토광묘 9기, 옹관묘 4기와 함께 토기窯址,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평면형태는 방형, 사다리꼴, 긴사다리꼴 등이 있으며 둘레에 周溝가 조성되어 있고 일부는 共有되고 있습니다. 인근에 신덕 前方後圓墳과 圓墳이 있습니다.

 

 

<土器 各種>높이(左)18.3cm/함평 월야 예덕리 만가촌 출토유물

 

萬樹里 4號墳』

墳丘의 형태는 長楕圓形이며 분구 둘레에 周溝가 있습니다. 분구내에서 토광 7基와 옹관 2기 등 두 종류의 매장시설이 조사되었으며 중심묘제는 토광묘입니다. 토광묘중심의 분구묘가 조성된 뒤 옹관이 들어온 형태이며 분구는 자연지형위에 일부를 성토한 것입니다. 주구는 일부가 斷切된 형태이며 전체에 돌려진 것은 아닙니다.

<만수리 4호분 중심유구> 규모(사진 앞부분)3.7mX2.5m, 깊이0.8m

 

<만수리 4호 출토유물 토기>높이(右)12.5cm

『新燕里 9號墳』

방대형의 墳丘 내부에 土壙墓 3基와 甕棺墓 4基가 조영되어 있습니다. 만수리 4호분의 경우와 같이 토광묘가 埋葬施設의 중심유구이며 비교적 窟壙의 깊이가 깊은 지하식입니다. 옹관묘는 모두 분구의 성토층에 위치한 지상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토광분구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築造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한편 墳構內 토광묘 下層에서 原三國時代 住居址 4基가 조사되었습니다. 생활주거와 분묘의 순차적인 造營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연리 9호분 중심유구>

<신연리 출토유물 토기>길이(右上)17.3cm

 

 <각종 옥(各種 玉)영산강유역 토광묘출토>

<각종철기(各種鐵器)영산강유역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