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화순 운주사 (和順 雲住寺 )

鄕香 2010. 11. 23. 00:28

한해도 막바지로 저물어가는 11월 중순 또 바람벽이 터졌나봅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안절부절 하다가 햇살 따습게 스미는 전라도 화순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보고 싶던 천년사찰 운주사와 질박하고 꾸밈없이 살갑고 우스꽝스럽고 바보처럼 소박한 석불,  순천의 선암사 뒷간과 늙은 매화나무(老梅) 그리고 교교한 달빛에 더욱 아름다운 무지개다리(虹霓橋), 송광사의 법정스님이 계시던 불일암자, 장중하고 고매한 아름다움의 사찰건축들, 또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거석문화 고인돌들이 그리워 미리 예약한 거점(據點) 금호화순리조트를 향해 3박4일 일정으로 달려 왔습니다. 오늘은 이틀 째날. 일찌감치 밥을 지어 먹고 숙소를 떠나 도착한 화순은 모든 가로수가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당단풍나무를 심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리조트에서 출발한지 40분 도착한 운주사는 돌로 된 石佛石塔이 각각 1천구씩 있었던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찰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석불 93구와 석탑 21기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1481년에 편찬된 「東國與地勝覽」에는,  "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 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초기까지는 분명히 실재했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 우유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縣의 남쪽 이십 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1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 개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재 남아 있는 석불상은 10m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작은 불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불상들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해학적인 표정과 자세에 둔중한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 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 주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는 백제인의 후예로 백제의 예술적 기술적 감각을 이어 받은 石人像을 제작하던 이 지방 석공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고려 불상이라 하겠습니다. 석탑21기도 山野 여기저기 즐비하게 서 있는데 둥근 원형석탑, 원판형석탑, 같은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한 편입니다. 일반적인 사각형 탑들은 너비가 좁고 높이가 高峻하며 屋蓋石이 평면적이어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꽃모양 받침돌(蓮花臺)들이 더러 보이는 것 또한 고려양식의 특징입니다. 특히 이 석탑에서 눈에 띄는 것은 基壇이나 塔身石의 面石에 × ◇ Ⅲ같은 幾何學 무늬들이 돋을새김(陽刻)과 선 새김(線刻)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입니다. 이런 기하학적 무늬의 애용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이 운주사 유적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으로 크게 주목됩니다. 이처럼 특이한 석불, 석탑 천 여구씩이 한 절 안에 봉안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例이어서 千佛千塔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美術史 내지 佛敎史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운주사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 차례의 發掘調査와 두 차례의 學術調査를 하였지만 운주사의 정확한 創建時代와 창건세력, 造成背景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히지 못하여 여전히 신비로운 사찰로 남아 있습니다.

 

 

 

  ① 매표소   ⑧ 광배 있는 좌불상    ⑮ 칠성바위   22 화장실   29 4층석탑
  ② 일주문   ⑨ 석조불감   16 종각   23 목욕탕   30 명당탑
  ③ 사천왕   ⑩ 원형다층석탑   17 보제루(종무소)   24 공양간   31 마애여래좌상
  ④ 5층석탑   ⑪ 5층석탑

  18 대웅전

  25 법성료   32 불사바위
  ⑤ 9층석탑   ⑫ 7층석탑   19 지장전   26 원융당   33 원구형석탑
  ⑥ 7층석탑(무늬없음)   ⑬ 시위불   20 지혜당 (서점.찻집)    27 운주선원   A~F 석불群
  ⑦ 7층석탑(XX문양)   ⑭ 와불   21 화장실   28 산신각  

 

 

《영귀산운주사일주문/靈龜山雲住寺一柱門》

 

 일주문을 들어서니 아침 이내라도 서린 듯이 서늘한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합니다. 본시 이 길을 닦기 전에는 밭과 논이었던 것을 운주사에서 매입하여 길을 넓히고 옛 운주사의 모습을 되찾고자 佛事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과 가정이 있으나 그 양식만은 유래가 없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世俗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은 천불천탑이 당대를 뛰어넘어 자유로움 속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백제인의 재능과 예술적 바탕을 이어 받은 이 지역 사람들의 정신이 일궈낸 해학적이고 일상 속의 생활 모습을 표현해낸 작품들입니다. 이곳 운주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신도와 애향인愛鄕人들이 모여 천불천탑의 못 다 이룬 꿈과 자유정신을 이어가고자 다시 천불천탑을 세워 어려운 현실에서도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고 그로 인해 부처의 위안을 기원하고자 불상 세우기에 뜻을 모았나봅니다. 이처럼 불상을 옛 것은 수습하고 또는 새로 만들어 정리하고 세워가고 있습니다.   

 

 

 얼굴과 몸에 비해 엄청 큰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수줍게 웃는 수더분한 아낙네 같기도 하고 ..

 

 

 한낮에 사랑방에 모로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 午睡를 즐기며, 지난 밤 꿀같이 달던 시악시의 엉덩이를 꿈꾸고 있는 작은 사랑채 젊은 서방님 같기도 하고, 김홍도의 풍속화 중 "타작"에서 한 귀퉁이에 돗자리를 깔고 이렇듯 모로 누워 곰방대를 물고 한창 타작을 하고 있는 일꾼들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양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참으로 보기 드문 이 불상을 보노라니 백제시대 사람들의 소박하고 재치 있고 해학이 넘치는 예술성을 보는 것에 절로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음에 즐겁습니다. 

 

 

잘 다듬어 번듯하게 생긴 조선의 선비 같은 얼굴과 달리 가슴과 아랫배에 둔 두 손은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것처럼 우스꽝스런 부조화에 더욱 친근감이 듭니다. " 배 아파" 아이가 배와 가슴을 감싸고 뒹굴고 있는 것에서 착안해 빗은 불상 같습니다.

 

 

요렇게 보면, 두 눈을 번쩍 뜨고 今時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동감이 차라리 섬뜩하기도 하고.. 

 

 

투박하고 후덕한 인심에 심성 좋은 이웃집 아저씨 얼굴 같기도 하고...

 

 

아이처럼 익살스러움이 두 눈에 담뿍 담긴 채 고개를 갸우뚱 이는 단발머리 소녀 같기도 하고...

 

 

和順雲住寺 九層石塔 (보물 제796호)

이 탑은 기단이 따로 없이 거대한 암반 위에 건립되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탑신에 가득히 조각되었으며 특히 지붕돌이 경쾌하여 전체적으로 장엄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어 운주사의 수많은 석탑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합니다. 탑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9층석탑은 자연암반 상면을 깎고 다듬어 삼단의 층을 두어 지대석모양으로 만든 위에 기단(基壇) 없이 바로 탑신을 올린 형식입니다. 상륜부 9,8,7,6번 옥개석 사이의 탑신 3개는 1개의 돌로 방형으로 만든 4면에 겹친 마름모형(◈)을 선각한 그 안에 상하좌우를 잇는 ┼선을 새겨 넣었습니다. 6번 옥개석에서 4번 옥개석 사이에 있는 2개의 탑신도 하나로 된 돌을 방형으로 만든 것이지만 문양은 마름모 문양 안에 4잎 꽃문양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4번 옥개석에서 1번 옥개석 사이의 3개의 탑신은 각각 4매의 판석을 조합하여 세운 것으로 각 면마다 2개의 마름모형을 돋음 선각하고 그 안에 4잎 꽃문양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지붕돌(屋蓋石)네 모서리 끝은 위로 솟아있고 옥개석추녀에는 모서리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의 대각선을 음각하여 추녀 밑 석가래 모양을 표현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문양과 탑의 형식은 일찍이 목격한 예가 없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9층 석탑입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설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 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습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어서,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입니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다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합니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천불천탑이란 말대로 발길 내딛는 곳마다 부처요 탑입니다. 그 많은 염원과 바람이 다 한 점 바람결이 되었건만, 그 숨결은 이처럼 여운으로 남아 후대의 발길을 이끕니다.

 

 

긴 코에 갸름한 얼굴 입은 작고 도톰하고 눈은 동그란 구슬 같고 긴 귀는 마치 길게 드리운 단발머리 같아 마치 일제강점기 시절 소녀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佛頭도 그 크기로 보아  큰 佛像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깨지고 조각난 불상들을 모아 논 모습입니다.

 

 

〈和順 雲住寺 七層石塔〉

 이 석탑은 운주사 一柱門 入口에서 일직선상으로 大雄殿을 바라보고 첫 번째로 있는 9층석탑(보물 제796호)다음인 두 번째로 있는 7층 석탑입니다. 원래는 주변이 논이었고 그 가운데 있었는데 운주사에서 주변 논밭을 모두 매입하여 잔디를 심고 정비하였답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충실히 따른 이 탑 기단이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石塊形 기단상면에는 원형 1단의 괴임을 만들어 윗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습니다. 初層과 二層 탑신은 4매의 판석을 짜 맞춘 것으로 각면 모서리에는 隅柱가 모각되었으며,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만든 탑신으로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었습니다.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상륜부는 유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9.6m 높이의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 쌍교차문 칠층석탑(雙交叉文 七層石塔)>

이 석탑은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光背를 갖춘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탑 역시 높고 큼직한 하나의 方形基壇石 위에 1단의 방형 굄대를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얹었습니다. 이 석탑의 외형을 보면 신라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층 탑신석에 특이한 쌍교차문(x x) 과 측면의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하는 등 국내 석탑에서는 그 유래가 없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층탑이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석탑으로 높이는 7.75m입니다.

 

 

< 광배 석불좌상(光背 石佛坐像)>

운주사 석불 가운데 광배가 있는 비로자나 手印처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불상으로 사다리꼴형의 판석에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가늘고 길게 솟은 코, 두툼한 입술, 크고 긴 귓바퀴가 선명하고 육계가 솟아 있으며 합장한 수인과 법의 자락은 線刻 처리하였습니다. 광배는 頭光과 身光의 구분이 없고 佛身 주변 전체에 동글동글 구름 모양의 火炎文을 아름답게 陰刻하였습니다. 불신은 도드라지게, 手印(손모양)과 코, 눈썹, 귀 등을 양각하였고 광배는 線刻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근엄하거나 위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매우 정겹고 친근감이 가는 모습입니다. 발굴조사 때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곳에 목조기와집을 지어 모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불상은 목에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오른손은 가슴 위치에 왼손은 배꼽위치에 두고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쳤으며 하의는 치마 주름이 선각되어 있습니다.  

 

 

운주사에는 대다수의 불상들이 이와 같이 두 손을 모은 합장식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이런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모습의 불상은 운주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靈龜山 雲住寺址 곳곳에 널려있던 불상들을 세우는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오랜 세월 雲住寺 절이 폐사되어 들이나 田畓으로 변모되어 그곳에 묻히거나 계곡에 쓸려있던 불상들을 모아 불상이 있던 자리나 적절한 곳에 다시 모셔놓는 役事를 벌이고 있습니다.

 

 

 시선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塔身이나 불상의 일부분이 널려 있습니다. 탑신으로 보이는 원통형으로 된 돌에 이끼만 무성하니 지난한 세월을 말합니다. 

 

 

바위위에는

 

 

 <석조불감 앞 칠층석탑 石造佛龕七層石塔>

석조불감(보물 제797호)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이 칠층석탑은 다른 석탑의 石塊形의 큰 방형의 지대석을 설치한 것과 달리 아주 낮은 지대석 위에 그대로 탑신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또 커다란 네모의 지대석 상면에 높이 5cm 정도의 1단 괴임을 마련하여 그 위로 탑신을 얹었으며,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를 이루고 있는 우동마루(내림마루)가 예리한 각을 이루지 않고 통통하게 묘사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어서 주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구성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탑으로 높이는 7.5m이며 고려시대 세운 탑입니다.

 

 

 원형 다층석탑(圓形 多層石塔) . 석조불감(石造佛龕) .  칠층석탑(七層石塔)

석조불감을 중심으로 앞에는 칠층석탑이 뒤에는 원형다층석탑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주사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석탑과 석불 중 이 石造佛龕은 골짜기의 중심부이며, 그 앞뒤에는 각기 탑이 1기씩 있어서 野外佛堂의 본존불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으며,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습니다. 이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을 서로 맞댄 모습으로 감실의 남측에는 석가모니불을, 북측에는 天衣 안으로 손을 합장하듯 모은 형태의 부처(비로자나불?)가 서로 등을 맞대어 모셔져 있습니다. 이는 흔히 볼 수 없는 例입니다. 이들 불상을 새긴 수법은 단순화되고 경직된 모습과 도식적이고 평면적으로 된 표현은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입니다. 또한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 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 돌문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인즉 이 돌물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 앞바다에 내다버렸다고 합니다. 불감(佛龕)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습니다. 다탑봉(多塔峰)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입니다. (보물 제797호)

 

답사를 간 (2010년11월17일) 날, 이 석조불감은 보수 중으로 검은 비닐로 돌려 가렸기에 실물을 자세히 볼 수도 사진찰영도 할 수가 없어 이 사진은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보수기간은 2011년 3월까지라고 합니다

 

<남쪽 감실 모양>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머리 윗부분이 파손된 상태인데 넓고 편평한 얼굴에는 눈썹과 콧등의 일부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습니다. 짧고 굵은 목에는 三道가 뚜렷하지만 목과 어깨부분이 붙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밋밋한 몸체 위로는 通肩의 法衣걸쳤으며 옷의 주름은 線刻으로 형식화 되었습니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있는 반면 왼손은 어깨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와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어색하고, 광배는 佛身과 약간 떨어진 뒤쪽의 판석에 頭光과 身光의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線으로 표현했는데, 불꽃무늬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북쪽 감실 모양>

 

북향한 이 불상도 남향한 불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두 손은 옷 속에 감싸여 있어 정확한 手印을 알 수 없습니다. 특히 옷의 주름이 어깨 위에서 내려오면서 가슴 앞의 손 부근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매우 도식적입니다. 이 불상들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표현이나 밋밋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및 치졸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雲住寺 圓形 多層石塔)>

이 탑의 구성은 거북이 모양의 한 장의 지대석이고 기단(基壇)은 2단의 평평한 둥근 돌에 높직한 5매의 돌에 角을 두어 모아 짜 맞춰 세워10각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蓮座臺 모양의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습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특유의 양식이라 하겠습니다. 기단의 맨 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합니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됩니다.

 

 

두 불상의 모습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꺾고 얼굴 표정과 모습이 여인으로 느껴질 만큼 갸름한 얼굴의 선이 유려한 불상입니다. 모든 불상이 근엄하고 경식된 형상으로 도식화 되었는데 이곳 운주사의 불상은 남도지방 사람들 특유의 예술적 동작이나 표정을 닮았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곳의 불상은 유난히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합장을 한 형태의 불상이 많습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例입니다.

 

 

범종각과 종무소

 

 

 '보제루'라는 명칭의 종무소건물입니다. 이 건물 가운데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앞 뜰입니다. 정면에는 '운주사'란 현판이 걸렸습니다.

 

 <梵鐘閣>

 

 <운주사 대웅전 앞 석탑 (大雄殿 多層石塔)> 화순곤 도암면 대초리20-1

대웅전 앞에 위치한 이 탑은 4층의 屋蓋石까지 남아있고 그 이상부재의 존재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옥개석 낙수면부가 일반적인 옥개석의 형태가 아니고 전탑과 같은 중급형으로 이뤄진 3계단의 모전석탑의 유형입니다. 각 층의 옥개석 전각부분에서는 가벼운 반전이 있어 전탑계 석탑이며 강진 월남사지 모전석탑과 비교됩니다. 전탑의 유형이긴 하지만, 돌을 작은 벽돌 모양으로 깎은 것이 아닌 통판석이므로 모전석탑의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전체 높이 3.23m이며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입니다.

 

 

<대웅전(大雄殿)>

 

 <지옥전(地獄殿)>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본시 우리의 민속신앙인데 불교에서 귀속시켜 모셔왔습니다.

 

 

 <발형 다층석탑(鉢形 多層石塔)> (전남 유형문화재 제282호) 도암면 대초리 18)

현재 대웅전 뒤편에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탑의 형식을 초월한 異形塔입니다. 1층과 3층의 부재는 주판알 같고 2층과 4층은 중심부에 1면을 만든 주판알 같은 모습입니다. 현재는 석괴가 4석이나 "조선고적보"에 의하면 7석의 괴석이 얹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유실되어 있습니다. 하부로부터 방형과 원형, 원형구형이 중첩된 평면인데도 조화가 잘 맞습니다. 전혀 색다른 형태의 석탑이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고 기발한 조영기법을 보이는 석탑입니다. 전체 높이 4.15m이며,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합니다.

 

 

명당탑을 거쳐 불사바위로 올라가는 길목

 

 

<운주사 명당탑(雲住寺 明堂塔)>

이 탑은 운주사 대웅전 뒷산인 영귀산(靈龜山)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寺刹 內에서는 가장 명당자리에 쌓은 탑이라 하여 '명당탑'이라고 합니다.  1장의 널적한 정사각형의 하대석위에 4장의 版石으로 方形의 기단석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판석을 덮고 원통형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원반형의 屋蓋石을 올린 3층 석탑으로 그 모양이 마치 조선시대 선비의 갓을 겹으로 올린 형국입니다. 

  

 

<화순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和順 雲住寺 磨崖如來坐像) >

마애불은 현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40m 떨어져 있는 퇴적암 벼랑에 새겨져 있습니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고 희미한 눈썹과 길다란 코 그리고 귀바퀴는 양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음각선의 옷 주름과 오른 소매에 사선의 옷주름이 Λ形 手印(손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운주사의 대부분 석불들이 이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座臺는 8葉의 覆蓮으로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頭光과 身光의 구분이 없이 무릎 위쪽까지만 陰刻線文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마애불은 운주사의 石佛群 가운데 유일한 마애불로 광배와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16m로 규모가 큽니다.

 

 

불사바위 있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 불사바위 (佛事岩) >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서 이곳 지형이 舟形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개(千個)의 부처과 천개(千個)의 탑을 세웠다 하여 일명 천불천탑이라 한답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 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현존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선국사가 앉아서 계곡과 좌우의 산을 바라보며 불사를 계획하던 바위(불사바위)와 운주사 경내의 천불천탑이 있던 계곡과 산의 전경입니다.

  

 

 불사바위에 앉아서 내려다본 운주사의 전경입니다. 계곡 오른편 산위에 와불(臥佛)이 있는 곳이 보입니다.

 

 

운주사의 主峰인 영귀산(靈龜山)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의금부사를 지내고  死後 호조참판에 추증된 李相이란 분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묘비의 碑蓋石을 보니 임금이신 王이나 사용할 수 있는 龍文을 그 것도 雙龍을 새겨 올렸으며 이런 名刹의 주산 정상에 墓를 쓰는 오만함도 보입니다. 이 묘 이외에도 臥佛이 있는 봉우리 정상 등 이곳 주변의 봉우리마다 이처럼 묘가 여러 곳 있습니다.

 

 

쌍용문의 碑頭

 

 아래면을 움푹하게 다듬은 암벽 (바위너설) 밑에 좌상의 주존불을 위시하여 시위불 2분과 작은 좌불상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타원의 얼굴에 눈썹과 긴 코를 새긴 것으로 보아 부처의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직선상으로 5개의 홈을 낸 것은 무슨 까닭인지...

 

 

좁은 미간에 긴 코, 오므린 입 도톰한 볼이 심상치 않은 표정입니다. 목에는 三道가  음각된 선으로 표현되고, 어깨 . 몸 . 팔은 U형의 음각선으로 법의가 입혀졌습니다. 팔은 가늘고 외소하며 손은 크고 넓적하게 펴서 과장되며 무릎아래 내렸습니다. 결부좌한  발바닥은 편평하여 작은 다과상을 놓은 것 같습니다. 요즘의 도식화된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어깨보다 넓게 옆으로 퍼진 허리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지역적 조형법으로 변화된 작풍으로 촌부의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편함을 줍니다. 

 

 

<운주사 거북바위 5층석탑(和順 雲住寺 龜岩 五層石塔)>

이 탑은 거북바위라 불리어지는 큰 암반 위에 또 다른 7층석탑과 근접해 있는데, 7층 석탑과는 달리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 탑의 옥개석 상면에 탑신 고임이 생략된 것은 운주사의 다른 탑의 기법과 동일합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고 있으며, 모든 탑신에는 隅柱가 표현되었으며 특히 2번 탑신은 4장의 판석을 끼워 맞춘 것으로 현재 한 면의 판석이 빠져 유실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신라 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를 보면 세련되었으며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이며 높이는 5.57m 입니다.

 

 

<운주사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和順 雲住寺 龜岩交叉文 七層石塔)>

거북바위라 부르는 다소 경사진 암반 위 부분적으로 완만하게 다듬어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부를 구성하였습니다. 2층에서 7층 탑신 사면에 X字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1층과 2층 탑신은 4장의 판석으로 꿰어 맞춘 것입니다.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는 등 백제계 석탑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 이러한 기법은 모두 지역의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고려시대에 나타난 백제계 석탑의 특징으로 전체높이는 7.17m 입니다.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는 5층탑과 7층탑이 세워졌고 그 바위 아래 너설에는 여러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석불입상은 와불 우측 발치 아래 넓은 바위 위에 마치 망부석처럼 홀로 세워져 있습니다. 육두는 높고 크며 손바닥을 편 오른 손은 왼편 가슴에  대각선으로 붙이고 왼손은 손바닥을 펴서 왼쪽다리에 붙였습니다. 눈은 음각선을 一字로 시원스레 새겼고 입은 작게 표현하였으며 준수한 외모의 얼굴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와불을 지킨다 하여 시위불 또는 머슴부처라고 부릅니다.

 

 

입상부처 얼굴 세부

 

 

 <화순 운주사와형석조여래불(和順 雲住寺 臥形石造如來佛)>

운주사 계곡 서편 산 정상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누워있는 坐像과 立像의 석불 2구로 일명 와불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坐像의 大佛은 어깨의 폭에 비해 무릎의 폭이 너무 넓어 인체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巨佛에 속한다고 보겠습니다. 小佛인 立像의 手印이 시무외인 여원인을 취한 것 같으나 어색하고 사실성을 잃었으며, 또한 옷주름은 수직선과 斜線으로만 처리하는 단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다 세우고 이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새벽닭이 울어 중단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운주사의 많은 석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석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석불은 각각 12.7m와 10.3m로 국내에서는 최대의 석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七星岩 앞 七層石塔 >

운주사 계곡 좌측 산 중턱에 칠성바위라 불리는 곳의 큰 암반 위에 있는 탑입니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만을 건립하였습니다. 탑신석 각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넓직한 우주(隅柱)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의 둔중한 느낌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 반전이 표시되었으며 낙수면도 平薄한 편입니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져 있습니다. 전체높이는 7m이고 고려시대 만들어졌습니다.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석공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습니다.

 

 

 

 

 

온 종일 운주사 경내를 걸어 다닐 때는 몰랐는데 단조롭지만 말끔하고 엄숙함 마쳐 감도는 맞배지붕에 삐쳐나온 연통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는 찻집을 보니 그저 주저 앉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선비의 사랑만 같을 안에는 한쪽에는 기념품이 전시되어 있고 한편에는 커다란 난로에 장작이 붉게 타오르고, 난로를 중심으로 네 곳에 茶卓이 놓였습니다. 창가 편에 앉으니 등이 따습고 창문에 걸어 둔 작은 風磬이 그렇게 그윽할 수가 없습니다.

 

山寺에 오면 옛 문화에 심취되어 젖어 듬도 좋지만 이렇게 노독을 한 잔의 토속적인 전통 민속茶를 음미하는 그 여운에 더욱 잊을 수가 없어 또 길을 나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스하고 달콤하고 씁싸래한 맛에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은 재료의 효험만이 아닌 찻간의 분위기와 창밖으로 보이는 호젓한 풍경이 주는 자연의 소리, 그 波氣의 여운이 스며듬도 한 까닭이겠지요.  

 

 

이렇게 앉아 창밖을 보노라니, 천불 천 탑을 스치던 바람이 천년세월에 묻혀 쌓인 갈망과 기원을 오롯이 실어다  저 작은 풍경소리로 풀어내어 나의 哀를 울립니다.

 

 

창가에 꺾꽂이된 망개나무를 보니 생각이 납니다.

어려서 서울 신당동 살 때 찹쌀로 편을 만들어 그 가운데에 곱게 빗은 단팥을 새알처럼 동글게 만든 것을 넣고 반을 접어 망개나무 잎에 싸서 쪄낸 망개떡과,  '당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찹쌀새알심에 곱게 이긴 단팥을 입힌 동그란 수수팥떡 같이 생긴 것을 대나무로 만든 꽂이에 다섯 개씩 꿰어 놓은 것을 초롱처럼 생긴 사방이 유리창으로 된 상자 안에 3단의 선반을 두고 그 위에 망개떡과 당고를 넣은 상자 두 개를 적당한 길이의 작대기 양끝에 걸어 어깨에 메고 다니며 당고, 당고 하며 팔러 다니던 아저씨들이 있었는데, 그 당고와 망개떡의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팥이 들어간 것이면 참 좋아 합니다. 그 후 불혹의 나이에 어느 해 가을 산에서 그 망개나무를 처음 보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멋지게 折枝된 넝쿨에 열두어 개씩 송이처럼 달린 빨간 열매에 연초록과 노랑으로 물든 잎은 저를 잡고 놓을 줄 모릅니다. 그 후 가을이면 인근 아차산에서 예쁜 망개나무가지를 구해서 하얀 벽에 걸어 놓고 겨우내 심오한 아름다움을 즐깁니다. 오늘 운주사 茶屋 창가 화병에 꽂은 망개나무 절지를 보며 메마른 가슴에 윤택한 행복을 가득 주워 담습니다. 고맙습니다.

 

 

일주문 안쪽 현판에는 바깥쪽과는 달리 千佛千塔道場'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2010년11월18일 和順 雲住寺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