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 속초 청호동 갯배 (강호동 1박2일 KBS )
東.西.南.北을 둘러봐도 모두 산으로 둘려 쌓인 조그만 전원도시에서 지낸지도 어언 5개월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집니다. 시원스레 확 트인 바다 그 바다를 보기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오색그린야드호텔을 예약하여 도착한 날, 호텔에 짐을 풀고 오색약수를 마시고 주전골과 금강문을 거쳐 용소폭포 . 12폭을 다녀와 1박 후 아침 일찍 바다를 보기위해 하조대를 거쳐 낙산사 의상대에 들렸습니다. 향해 갑니다. 낙산사는 火災를 입은 직후 보고 4년 만이었습니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4월 5일 양양군 일대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단원 김홍도의 「洛山寺圖」와 발굴조사를 근거로 조선전기의 가람배치의 형태대로 전각 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천년 고찰의 모습을 다시 찾아 2009년 10월 12일 회향을 하였습니다.
낙산사는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며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에서 "낙산"이란 절 이름이 유래되어 1300여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동해에서 해오름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일찍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알려졌으며 명승 사적지(명승 27호.사적지495호)로 지정되었으며, 원통보전 . 칠층석탑 . 건칠관세음보살좌상 . 부처님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 홍예문 . 홍련암 .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 창건주 의상대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가 있는 의상기념관 등 많은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는 관음성지이자 천년 고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義相記念館과 洛山茶來軒 건물이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경내의 푸르름이 제법 옛 모습을 찾아갑니다.
義相記念館 옆에 세워진 이 시조비는 안축 선생이 지은 詩韻를 새긴 碑입니다.
安軸 先生은 고려 말기 文人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大提學으로 儒學의 대가였습니다. 선생의 關東別曲은 景幾體歌의 대표작으로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洛山寺 詩韻"은 안축선생이 강원도 存撫使로 이곳에 왔을 때 '觀音窟' 즉 오늘의 홍련암에서 체험한 관음신앙기입니다. 麗末 격동기를 살았던 선생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를和諍精神으로 수용한 大乘的 도량을 겸비한 깊은 사상을 높이 받들어 여기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한답니다.
의상기념관 마당 한 편에 마련된 수조에 맑은 물의 빛깔에 눈도 마음도 정갈하게 씻어진 느낌입니다.
물은 더 없이 고맙고 참으로 경이로운 우리의 생명이지요.
동쪽에서 바라본 의상대 주변의 소나무들 참으로 그림 같습니다.
" 철운조종현대선사시조비 鐵雲趙宗玄大禪師詩調辭"
나 이곳에 홀로 앉아, 한줄기 솔 바람이고, 한 점 구름이었네.
옛 우리의 선조께서는 정원에 이런 우리의 들꽃은 두고, 흠모하고 기쁨을 취하였으며 소박한 멋을 익혔습니다.
호랑나비
홍련암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돌아서서 바라본 의상대
멀리 홍련암을 바라보니 성벽을 두른 요새처럼 보입니다.
비석에 한 폭의 그림이 담겼습니다. 한 여인과 바다 그리고 ...
碑文 :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가 낙산사를 참배하기 위해 오다가 보니 흰옷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대사가 그 벼를 달라고 여인은 벼가 익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사가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을 만나 물을 청했는데 여인은 빨래를 빨던 더러운 물을 떠주었다. 원효가 그 물을 버리자 이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스님은 가지 마십시오" 하고는 숨어버렸다. 원효가 돌아보니 그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 짝이 관음상 앞에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앞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고 그 우물을 오봉산 정상 넘어 에서 찾아내어 우성건설 최승진 거사님의 시주를 받아 이 자리와 낙산사 원통보전에 흘러넘치게 하였다. - 1994년12월 도선 글 -
보살상의 오른 손 검지에서 약수가 마치 아이의 오줌줄기처럼 뿜어내고 있습니다.
수국의 색깔이 참 곱지요?
바다와 추녀 밑 풍경에 달린 물고기가 시선을 끕니다. 풍경은 사람들의 고요하고 섬세한 심성과 심미안이 엮어낸 멋입니다.
<紅蓮庵>
<홍련암 법당>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의상대사(625~702)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여기에 와서 파랑새를 만나 뒤를 따라 갔는데 파랑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답니다. 이윽고 7일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紅蓮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서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의 홍련암 법당건물은 1975년에 지어졌으며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낙산사의 대부분 주요건물과 홍련암 요사가 전소되는 2005년 4월 火魔때에 기적적으로 재난을 면했답니다.
홍련암 암자 마룻바닥에10×10의 정사각형으로 된 유리판이 있어 들여다보면 암자 밑 협곡에 바닷물이 넘나드는 것이 보입니다.
여러 불교신자들이 예불 겸 마룻바닥 창을 통해 암자 밑을 들여다보기 위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보타낙(寶陀落) 앞 연못으로 남생이가 한 마리가 헤엄쳐 가는 것이 보입니다.
다른 남생이 한 마리는 바위에 올라 뒷다리를 주 욱 뻗고 머리는 길게 치켜 올려 일광욕을 즐깁니다.
보타낙(寶陀落) "보타낙산"에서 따붙여진 이름으로, 이층누각입니다. 아래에는 야외식탁을 마련하여 방문객이 쉴 수 있게 하고 자동커피기를 설치하여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보타전(寶陀壂)
모든 관음상을 모신 불상전입니다.
해수관음상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바다로 부터 河海같은 자비로움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음보살 동양에서 제일 큰 석조관음보살이라고 합니다.
해수관음전의 추녀에 매단 풍경.
海水觀音殿입니다. 해수관음상 단 아래 낮은 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해수관음전 안 유리면(窓)을 통해서 해수관음상의 얼굴이 보입니다.
해수관음보살상
해수관음상이 세워져 있는 단에서 들여다 본 해수관음전의 유리면입니다. 해수관음전 안에서 이 유리면을 통해 해수관음상의 얼굴이 보이지요.
낙산사해수욕장의 전경입니다.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억새꽃이 먼 바다에 떠가는 배를 손 흔들어 전송하는 듯 보기에 좋았습니다.
「 꿈이 이루어지는 길」 님들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원통보전의 담장이랍니다. 돌담장에 담쟁이가 곱고 아름다운 빛깔로 繡를 놓았습니다.
곱게 물든 담쟁이와 쑥부쟁이 하얀 꽃이 돌담에서 서로 고움을 겨룹니다.
원통보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통해 칠층석탑과 원통보전의 현판이 보입니다. 문 양옆 벽에 금강장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새로 단장한 단청이 매우 밝고 아름답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서방정토로 들어서는 문을 지키는 사천왕 중 창을 든 광목천왕像
사천왕 중 장검을 든 지국천왕 像
圓通寶殿은 일찌기 임진왜란으로 全燒된 뒤 중건하였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소되었습니다. 이후 1953년 4월, 당시 1군단장이었던 이형근 장군(李亨根 將軍)이 원통보전 . 범종각 등을 복구 했고,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 했으나 다시 2005년 4월 5일 전소 되어 2009년 10월 12일 중건 되었습니다.
賓日樓 東海를 바라보며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을 가진 이 누각은 조선 중기의 東京遊錄에 그 이름이 처음 나옵니다.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1879~1944)스님이 쓴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史籍에 의하면 1888년과 1912년에 각각 중건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홍도의 洛山寺圖와 발굴 조사된 유구에 따라 전면 삼칸 옆면 두칸에 전면은 팔작지붕 뒷면은 맞배지붕 형태로 지었습니다. 佛紀 2553년 10월12일 양양지역의 자연석과 2005년 4월 낙산사 화마를 면한 기둥으로 완공하였답니다.
「 賓日樓」 "해를 맞이하는 누각"의 안쪽입니다.
고향당 옆 종각에 보존되어 있던 조선시대 鐘(보물 제479호)은 안타깝게도 2005년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2006년 10월 16일 현대의 과학기술로 완벽히 복원되어 현 범종각에 봉안되었습니다. 銅鐘의 정상에는 반룡 두 마리가 서로 엉크러져 龍紐를 이루고 있어 매우 사실적인 표현법으로 裝飾되어 있고, 중앙의 옆띠와 물결무늬 옆띠 사이에 長文의 銘文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명문은 김수온(세종.세조때의 문신)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썼는데, 그 내용으로 이 동종은 조선 세조 임금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종(1469년)이 만들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낙산사 동종은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全高 158cm, 口徑 98cm>
범종각은 ┼자형의 전각으로 범종 목어 운판 북 등 불전사물을 갖추었는데, 범종은 2개로 큰 것과 좀 작은 것이 있습니다.
「 洛山 배(梨) 」
낙산배는 조선 成宗(1469~1494)때에 주요 과수로 지정된 재래종 黃實梨 품종이 낙산사 周邊에 재배되어 上品은 나라에 진상품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 植裁된 長十郞은 1893년 일본에서 개량되어 1915년 주지스님에 의해 道內最初로 경내에 재배되어 83년간 낙산배 명성을 지켜온 始祖木입니다. 연구모임회를 중심으로 낙산배를 세계적 명품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수출작목으로 육성하고자 뜻을 모아 이에 1997년 11월 8일, 襄陽郡守가 이 由來碑를 세웠습니다.
홍예문
「 길에서 길을 묻다.」 삶에서 도리를 묻는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데, 우리 삶의 길도 한번 잘못 들어서면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돌이킬 수도 없이 인생을 망치는 길이니 진중하게 뜻을 세워 실천해야겠습니다.
KBS 放映 "강호동 1박2일"의 장소 속초의 청호동 갯배나루입니다. 생선구이를 좋아하는데다, 방송에서 강호동 1박2일 방영에서 푸짐하고 물 좋은 생선이 먹음직스레 소개되기에 속초에 온 김에 점심을 생선구이로 하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승선 요금은 자전거도 사람도 손수레도 모두 편도에 200원입니다. 사람이, 자전거 . 손수레 값으로... ㅎ
건너편에서 들어오는 갯배, 승객은 대부분 관광객입니다.
도시가 바다에 떠 있는 水上도시처럼 보입니다.
양편 부두에 연결된 鐵線에 걸쇠로 걸어 당겨 끌면 갯배가 앞으로 가는데, 아가씨들이 호기심에 걸쇠를 잡아끌고 있습니다.
강호동 1박2일에 방영된 집입니다. 선전만 믿고 들어가 주문을 했는데, 소문난 잔치집 먹을게 없다더니 나올 때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잔물고기에 물도 안 좋고 맛도 없고... 친구 말대로 다른 집으로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래도 한 번을 들려봐야 미련이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실망을 다독입니다.
어쨌거나 점심을 해결했으니 음식점을 나와 주변을 간단히 둘러보고...
다음 장소로 향해 다시 갯배에 오릅니다.
승객이 없어서 인지, 사공(?)인지 선원인지 모르지만, 끌어 당기는 사람이 혼자하기에 저도 걸쇠를 철선에 걸고 끌어 봤습니다.
승객이 많으면 힘 들겠어요. 내릴 때 품삭을 달랬더니 웃음 한바가지를 주더라고요.ㅎㅎ
점심이야 기대에 못 미쳤지만,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발길을 돌리며 쳐다 본 매표소 간판이 1박2일과 가을동화의 포스터 같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2010/9/29(수)仁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