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태항아리 . 외항 . 내항 . 태지석(白磁胎缸 . 外缸.內缸.胎誌石)
뭉툭하게 外反된 口緣이 달려있고 器形은 肩部에서 벌어졌다 서서히 좁아진 長身의 항아리로 어께 네 군데에 둥근 고리가 달려있습니다. 또한 뚜껑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린 蓮峯形의 손잡이 꼭지가 달려 있고, 이 꼭지를 중심으로 放射形으로 8개의 선을 굵게 음각하고 뚜껑의 끝부분에서 다시 삼각형으로 음각하여蓮葉을 나타낸 조촐한 모습의 문양이 특이합니다. 항아리의 유색은 짙은 회백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벽은 두껍고 묵직하며 동체의 전면에는 새끼줄 흔적이 남아 있어 주목됩니다. 항아리 내면에는 물레 자국이 거칠게 남아 있으며, 항아리의 바닥은 벽돌색으로 시유되어 있습니다. 뚜껑의 內底 중앙에 '卍'자 銘을 음각으로 조그맣게 나타내었고 그 주변에 태토 비침눈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11곳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색과 뚜껑에 시문된 특이한 蓮葉文 등은 특이한 것으로 15세기 후반 경의 백자의 모습과 태항아리의 양식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예입니다. 특히 내항과 태지석이 함께 출되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태항아리입니다.
백자태항아리 . 외항(白磁胎缸 . 外缸)
朝鮮時代 15世紀(1476年) / 出土地未詳 /總高57.7cm, 缸高44.7cm, 口徑24.7cm, 底徑 20 cm 蓋高13cm, 蓋徑28.8cm, /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胎)를 소중히 여겨 항아리에 넣고, 이 항아리를 다시 큰 외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출생연월일시와 태를 매장한 시기를 기록한 지석(誌石)을 함께 묻은 다음 태비(胎碑)를 세웠습니다.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임시로 묻힐 것을 고려하여 석실을 만들어서 보관하였습니다.
이때 매장된 지석을 태지(胎誌)라고 하며,
태지는 보통 오석(烏石)이나 대리석일 경우에는 사각형으로 만들게 되며, 청화백자나 동화백자일 경우에는 접시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자태항아리 . 내항(白磁胎缸 . 內缸)
朝鮮時代 15世紀(1476年) / 出土地未詳 /總高 36.5cm, 缸高 29.3cm, 口徑 10.5 cm, 底徑 10.5 cm 蓋高 7.2cm, 蓋徑13.2cm, /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태항아리와 함께 출토된 태지석으로 이태지석에 의하면 위의 태항아리는 王女 阿只氏의 태항아리로 1476년(成化12)6월19일에 胎封에 立石하였음을 밝히고 있어 成宗의 12녀 중 한 왕녀의 태항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지석(胎誌石)
朝鮮時代 15世紀(1476年) / 烏石 / 縱 28cm, 橫22cm, / 高麗大學校博物館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