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미 민영익 필 묵란도(芸楣 閔泳翊筆墨蘭圖)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선비화가로 자는 자상(子湘),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또는 천심죽재주인(千尋竹齋主人)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민태호(閔台鎬)의 아들로 민승호(閔升鎬)에게 입양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고종 14년(1877) 문과에 등제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미국전권대신,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고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905년 러일 전쟁 후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생애를 마쳤습니다.
민영익은 구한말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낸 정치가인 동시에 묵란과 묵죽을 잘 그린 문인화의 명수(名手)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난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大院君)의 석파란(石坡蘭)과는 달리, 짙은 먹을 써서 난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가장 특징이며, 필치가 웅장하고 시원스럽습니다.
특히 민영익이 그린 노근란(露根蘭)이 있는데, 이는 뿌리가 드러난 난초를 크게 두, 세무더기로 나누어 화면에 적당히 배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의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 1241∼1318)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는 예사 난초 그림이 아닙니다.
1910년 8월29일 벌써 일주일 전에 이완용 등이 남몰래 조인해 두었던 매국의 한일합병조약이 순종황제의 조칙을 가장하여 공식으로 발표되었지요.
500년 조선왕조가 하룻밤 꿈인 양 스러진 것이지요. 비보를 접한 민영익은 쓰라린 통한과 오갈 데 없는 절망감 속에서 뿌리 뽑힌 난초를 그렸습니다.
가슴 저미는 망국의 아픔을 난 이파리마다 아로새길 적에 난꽃이 눈물에 흠뻑 젖은 눈처럼 그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 었겠지요.
그림에는 빼앗긴 국토의 흙 한 줌도 그리지 않고 연약한 뿌리는 마치 쑥대머리인 양 처참하게 드러 냈습니다.
그는 45세때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당대(當代)의 명가(名家)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과 친교하면서 한묵(翰墨)으로 지내다가 합방의 소식을 들은 이 후 날이면 날마다 폭음으로 지새우다 1914년 윤5월15일 뿌리 뽑힌 난초같았던 그의 삶도 마감했습니다.
운미 민영익 필 묵란도(芸楣 閔泳翊筆墨蘭圖)
朝鮮時代 末期 / 芸楣 閔泳翊(1860 - 1914) / 紙本水墨 31×56.5cm /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