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한성시대풍납토성유물(風納土城遺物)
風納土城은 한강변에 위치하는 둘레 3.5km현존2.2km)의 반타원형 판축토성(板築土城)으로 중국제 초두를 비롯한 최상급의 위신재들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백제 초기 왕궁터로 주목받은 곳입니다. 최근 발굴 결과 환호를 두른 집자리와 토성의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특히 토성이 폭 40m, 높이 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임이 새롭게 확인되었습니다. 토성의 구조는 성벽 가장 밑쪽에 뻘로 기초를 다진 뒤 아래쪽에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중심 토루를 쌓고, 안쪽으로 사질토와 모래, 점토다짐 흙과 뻘흙을 위주로 한 판축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인 뒤, 도루 위에 강돌로 된 3단의 석렬과 할석렬 1단을 쌓아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도제아궁이 틀(竈閉銷陶板)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1지구/길이(左)42.2cm/문화재연구소
도관(陶管)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길이(右)17.0cm/문화재연구소
돌절구대석(石臼磨)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높이8.3cm/문화재연구소
어망추(漁網錘)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길이(右)7.9cm/문화재연구소
숫돌(砥礪石)
백제 한성시대/서울 풍납토성/길이15.0cm 무게121g/문화재연구소
방추차(紡錘車)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지름(左)5.7cm/문화재연구소
초두(鐎斗)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최대20.8cm/국립중앙박물관
흑갈유병 저부.구연부.청자병저부.청자귀(中國陶磁片 各種)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최대21.1cm/문화재연구소
흑색마연토기뚜껑.심발형토기.뚜껑(黑色磨鉛土器蓋.深鉢形土器.圓盤形蓋)
백제 한성시대/풍납토성/높이(中)8.9cm/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사적11호)의 조사는 1964년 10월19일부터 11월4일까지 金元龍 博士에 의해 토성의 성격 파악에 주안점을 두고 계획되었으나 통성의 규모가 큰데다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토선 북반부에 8개의 시굴핏트를 조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긴 장방형의 토성은 북벽이 약 300m, 동벽이 1500m, 남벽이 200m 가량되며, 야시에 유실되고 남은 서북벽 250m를 가산하면 조사당시 성벽의 합계는 2,250m 가량 되었습니다. 성내부는 동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는데, 성벽은 오랜 세월로 유실로 축성 당시보다는 훨씬 낮아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반대로 성내부 지면은 당시보다 최고 2~3m정도 높아진 것입니다. 한편, 비교적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었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죽여서 基部를 만들고 있으며, 성벽 기부에서의 폭은 30m 가량이나 됩니다. 그리고 단면에서 보면 돌은 거의 없고 고운 모래뿐인데, 그것을 얇은 층으로 한층 한층 다져서 쌓아 올라가고 있읍니다.
풍납토성 내부 전경 (가옥들 뒤로 토성이 보임 /1964년)
현재 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기는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성벽뿐이고, 성벽의 경우도 북벽과 동벽, 남벽이 남아 있으나 북벽의 가운데는 뚫려서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동벽 일부는 유실되고 곳곳에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또 1964년 조사 당시 이미 홍수에 의해서 유실되어 버린 서벽 일대에는 강변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성의 원형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성벽도 바로 밑에까지 주택이 들어서 있어서 성벽은 주택에 묻혀 있는 실정입니다.
성내부 또한 주택과 아파트가 가득 들어 차 강쪽을 막고 있어서 성의 본래 모습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1964년 시굴조사를 통하여 모두 15개 기종 108개개체분으로 주요 기종으로는 고배류, 삼족기류, 장란형토기류, 심발형토기류, 시루류, 호, 옹류 등으로 이들 토기류의 형태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이들 토기가 제작 . 사용된 시기는 대체로 4세기 중엽경이나 그보다 약간 이른 시기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토기류의 기종 구성은 초기백제의 주요 居城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는 몽촌토성의 백제토기 기종의 구성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 구성비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비율을 보이고 있고, 그 시기도 몽촌토성 출토 백제토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풍납토성이 몽촌토성과 비슷한 시기에 城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나 구체적으로 이들 두 토성이 어떤 역활과 기능을 하였는가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습니다. 근래 성내부 주택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백제시대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진행 되고 있으며, 원삼국시대에서 초기백제에 걸친 유구와 유물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고 있으며 향후 조사성과에 따라 풍납토성의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 여기 아래에 게재된 유물은 대부분 1920년대에 수집되어 서울大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는 유물입니다.
풍납토성 내부남벽 전경(1996년)
풍납토성 북동모서리 성벽 전경(1996년)
풍납토성 내부 발굴조사광경(국립문화재연구소. 1997년)
풍납토성 백제시대 주거지 전경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년)
굽접시(高杯)
백제 한성시대/ 64 - 풍납토성 /구경13.1cm 높이5.6cm 저경8.7cm /서울大學校博物館
굽접시 각종(高杯 各種)
백제 한성시대/64-풍납토성/높이(右)6.1cm 구경12.2cm저경8.5cm/서울大學校博物館
긴목항아리(廣口長頸球形壺)
백제 한성시대/64 - 풍납토성/구경14.1cm 높이18.2cm/서울大學校博物館
깊은 바리(深鉢形土器)
백제 한성시대/64 - 풍납토성/구경12.2cm 높이12.0cm 저경9.8cm /서울大學校博物館
뚜껑(蓋)
백제 한성시대/64 - 풍납토성/구경13.0cm 높이6.4cm/서울大學校博物館
작은 단지(直口小壺)
백제 한성시대/64 - 풍납토성/구경9.7cm 높이5.2cm/서울大學校博物館
원통형그릇받침(圓筒形器臺)
백제 한성시대/64 - 풍납토성/높이18.0cm, vhr1.8cm /서울大學校博物館
參考資料出處 : 서울大學校博物館 . 國立中央博物館 . 國立文化財硏究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