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유물( 遺物)

중국 청대벼루(中國 淸代 硯)

鄕香 2009. 7. 10. 00:15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연재변증설(硯材辨證說)과 고와징니이연 변증설(古瓦澄泥二 辨證說)에 중국의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벼루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벼루(硯)는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어 사용하였음을 입증합니다. 문방사우(文房四友)는 문방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필묵연의 필기구를 말합니다. 이 네가지는 서로 떨어져 사용될 수 없는 벗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 용어는 唐의 한유(韓愈)가 붓을 의인화한 모영전《毛潁傳 》에서 " 영(붓)은 강현 사람 진현(먹)과 홍농사람 도홍(벼루)및 회계의 저선생(종이)과는 우애가 깊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후에 「 문방사우」라는말의 출처가 된 것으로 봅니다. 도홍은 벼루를 의인화 한 것으로서 도제(陶製)의 벼루는 硯池가 깊고 그 모양이 凹 형을 이루어 도홍이라 하였답니다. 宋나라 사람 소이간(蘇易簡)은 문방사보(文房四譜)에서 '지필묵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이들이 문방사후에 봉해진 내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이에 관해서, '저지백의 자는 수현이며 화음 출신으로 호치후에 봉해졌다."<楮知白 字守玄 華陰人也 封好치(田+寺)侯>."라 하였습니다. 중국의 국어사전에는 호치후의 치(田+寺)음과 지(紙)는 음이 비슷하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붓은, " 모원예이며 자는 문봉, 의성 출신으로 관성후에 봉해졌다. (毛元銳字文鋒, 宜城人也, 封管城侯)" 고 하며, 그 출처로서 한유의 ,모영전>을 인용하였답니다. 먹에 관해서는, " 이현광의 자는 처해, 연나라 출신이다. 의성의 모원예(붓)와 화음의 저지백(종이)과 더불어 몸에 배게 힘들여 배워 문장을 이룬다. 천자는 선비를 중히 여기어 송자후에 봉하였다.<易玄光字處해(日+每), 燕人也, 宜城毛元銳, 華陰楮知白爲文章濡梁之友, 天子重儒, 封松滋侯>."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벼루는 별칭을 석허중이라 하는바 이에 관해서는 " 석허중의 자는 거묵이며, 남월인이다, 즉묵후에 배수하였다, 관성 모원예와 연인 이현광, 화음 저지백과는 출처가 같다. <石虛中, 字居默, 南越人, 拜卽墨侯, 與宜城毛元銳, 燕人易玄光, 華陰楮知白同出處>.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망대하 굽이치는 물결위에 큰 거북한마리가 물결을 희롱하듯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도낙서벼루(河圖洛書硯)

中國 淸代/ 15.0×8.4 높이 3.6cm / 권도홍 所藏

 

 

 

큰 내가 흐르는 듯 무늬가 있는 硯石에 맞춰 주변에 수려한 산세와 집과 정자와 다리를 놓고 각종 정원수를 심은 듯 새겨 하나의 자연스런 구성을 조화롭게 이뤘습니다. 橋脚을 거쳐 절벽을 이룬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물결인양 보이는 硯石의 문양을 잘 살려 이용한 아름다운 벼루이군요.

 산수누각문벼루(山水樓閣文硯)

 中國 淸代/ 23.2×16.3 높이 2.4cm / 박노수所藏

 

 硯池에 무을 휘감으며 하늘을 향해 火炎을 뿜어내는 모양을연상케 합니다.특히 硯石에 눈이 박힌 흰 부분을 용의 화염 불꽃으로 처리한 것이 재밌습니다. 구름과 물결과 용신의 새김이 세밀합니다.  

 

 운용문벼루(雲龍文硯)

 中國 淸代/ 17.2×13.1 높이 2.3cm / 권도홍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