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조선국 제10대 왕 연산군, 왕비 거창군부인 신씨 (묘)/ 燕山君, 居昌郡夫人 愼氏 (墓)

鄕香 2009. 7. 4. 09:33

《왕 연산군·비 거창군부인 신씨 / 능묘》 도봉구 원당길 방학동 산77 

 

燕山君墓는 朝鮮 第10代 임금 연산군 융(燕山君 : 1476-1506)과 王妃이셨던 居昌郡夫人 愼氏(1472 - 1537 )의 묘이다. 廢王 燕山君은 成宗의 큰 아드님으로 태어나 19세에 왕이 되셨다.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셨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 中宗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다.(1506). 그 해 연산군은 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왕비 거창군부인과 사이에 4남 3녀를 두셨다. 세상을 떠난지 7년 후 中宗 7년(1512)에 거창군부인 신씨(愼氏)의 上言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1513). 그 후 중종 32년(1537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여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曲墻),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 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묘역 아래쪽에는 태종의 후실 悲運의 궁인 조씨의 무덤과 폐왕 연산군의 사위와 따님의 무덤이 있다. 

 

 

봉분(封墳) 앞에서 마주볼 때 좌측 봉분이 임금 연산군 묘(燕山君 墓)이고, 우측 봉분이 왕비 거창군부인 신씨(居昌君夫人 愼氏)봉분이다. 

 

 

 《연산군 묘와 표비(燕山君 墓 表碑)》 (前面)

 

燕 山 君  之墓

 

표비(表碑)는 비각 없이 봉분 앞에 세웠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君夫人 愼氏)》

봉분과 표비 (앞면)

 

居昌君夫人 愼氏 之墓

 

 

연산군묘의 장명등

 

 

거창군부인 신씨 장명등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양편에 2개씩 모두 4개가 있다. 이 문인석의 눈과 얼굴에 참담함이 서려 있다. 

 

 

문인석의 눈매와 얼굴에 원망의 빛과 서글픔이 서려 있다.

 

 

 

 

〈태조의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세종 15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2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공비가 가례색에서 뽑은 처녀들을 불러 보다

공비(恭妃)가 가례색(嘉禮色)에서 뽑아 올린 상호군(上護軍)
조뇌(趙賚)와 좌랑(佐郞)
장수(張脩)와 전 현감
신기(愼幾)의 딸을 궁중에 불러 보았다. 처음에
변계량
조말생에게 말하기를,
“대비가 이미 돌아가고,
김씨(金氏)도 또한 나가 버렸으니, 마땅히 태상왕을 위하여 다시 명가(名家)의 딸을 가려서 빈(嬪)과 잉첩(媵妾)의 모자라는 데를 보충해야 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의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청하였다. 태상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하고 싶지 않다. ”
라고 하였으나, 굳이 청하니 그제야 이를 허락하였다. 가례색에서 두 서너 사람을 뽑으니, 이에
조씨(趙氏)를 맞아들이기로 결정하여 필단(匹段)과 견자(絹子)를
조뇌의 집에 내리고 기일이 며칠 있었는데, 태상왕이 다시 오랫동안 주저하더니 마침내 맞아들이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5권 11장 B면
【영인본】 2책 475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세종 16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5월 12일(무진) 3번째기사
상호군 조뢰의 딸로 하여금 수강궁에 들어와 성복하고 범절을 궁주의 예와 같게 하다

상호군(上護軍)
조뢰(趙賚)가 지신사(知申事)
김익정(金益精)에게 이르기를,
“내 여식이 비록 혼례식은 거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미 택일하여 궁중에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도의상 당연히 성복(成服)해야 할 것이다. ”
하였다.
익정이 그 말을 계하니, 예관에 명하여
《예경(禮經)》을 상고하게 하였는데,

증자(曾子)가 묻기를, ‘며느리 볼려고 혼인 날까지 받아 놓고 죽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위될 사람이 재최(齊衰)를 입고 조문해야 하며, 장사지낸 뒤 복을 벗는 것이요, 남편될 사람이 죽어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 ’ 하였다. ”
이에
조씨(趙氏)로 하여금
수강궁(壽康宮)에 들어와 여러 빈어(嬪御)들과 같이 성복(成服)하고 음식과 의복 기타 지공하는 범절을 궁주(宮主)의 예와 같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6권 8장 A면
【영인본】 2책 481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세종 17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9월 25일(기묘) 1번째기사
조씨로 의정 궁주를 삼다

조씨(趙氏)
의정 궁주(義貞宮主)를 삼으니,
조뇌(趙賚)의 딸이요,
이씨(李氏)
혜순 궁주(惠順宮主)를 삼으니,
이운로(李云老)의 딸이다. 처음에 임금이
김익정(金益精)을 시켜
이원(李原)에게 의논하기를,

조씨는 가례색(嘉禮色)이 뽑았으므로 빈을 봉하고자 하니, 어떠하냐. ”
하니,
이 말하기를,

조씨가 예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빈(嬪)을 봉(封)할 수는 없는 것이라. ”
하였는데, 임금이 그러하게 여겼다.
조대림(趙大臨)으로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을 삼고,
허조(許稠)로 이조 판서,
이지강(李之剛)으로 호조 판서,
김여지(金汝知)로 예조 판서,
탁신(卓愼)으로 의정부 참찬,
박광연(朴光衍)·
권만(權蔓)으로 중군 총제(中軍摠制),
이수(李隨)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삼고,
조치(趙菑)로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삼아 그대로
전라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全羅道水軍都安撫處置使)로 유임시키고,
조뇌(趙賚)는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서미성(徐彌性)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
배윤(裵閏)으로 사헌 장령(司憲掌令),
정갑손(鄭甲孫)으로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
이흥발(李興發)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
현귀명(玄貴命)으로
경상도 병마 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
박구(朴矩)
경상좌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
문귀(文貴)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
노원식(盧原湜)으로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자지(金自知)로 판원주목사(判原州牧事),
최순(崔詢)으로 판춘천도호부사(判春川都護府事),
최견(崔蠲)으로 판안변도호부사(判安邊都護府使),
이상흥(李尙興)으로 판경원도호부사(判慶源都護府使)를 삼았다.
신(愼)은 가선(嘉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뛰어올라 자헌(資憲)을 받게 되니,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재주도 없이 여러 번 주상의 은덕을 입사와, 직위가 2품에 이르게 되나, 조금도 도움도 되지 못하고, 이제 또 뛰어서 재보(宰輔)의 임명을 받게 되니, 반드시 벼슬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기롱만 들을 것입니다. ”
하매,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신(愼)은 겸손하고 고요하여, 주장한 것이 분명하고 정성스러워서, 외화(外華)는 없으나, 학문은 정밀하였고, 동지(動止)가 법도가 있었다. 임금이 그의 어짊을 알고 가려서 달리 대접한 것이다.
뇌(賚)
의정 궁주(義貞宮主)의 부친으로 상호군(上護軍)에서 가선(嘉善)을 받게 되고,
치(菑)
왜(倭)를 잡았다는 공로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휘하(麾下)로 옮기게 된 것이요, 전 동정(前同正)
정숭립(鄭崇立)은 사직(司直)이 되고, 전 천호(前千戶)
박현우(朴賢祐)·
김득명(金得明)은 위용 장군(威勇將軍)이 되고, 또 군공(軍功)으로 일등 선군(一等船軍)은 하번 갑사(下番甲士)에서 한 등급을 올려 주고, 이미 공패(功牌)를 받은 염간(鹽干)에게는 해령 대장(海領隊長)을 시키고, 이등 선군(二等船軍)은 해령(海領)에서 한 등급을 올려 주게 하고, 이미 공패(功牌)를 받은 염간(鹽干)에게는 해령 대부(海領隊副)를 시키고, 공패(功牌)가 없는 자에게는 공패를 주게 하고, 삼등(三等)에는 각기 쌀[米] 넉 섬, 면포(綿布) 세 필을 내리고, 또
윤득민(尹得民)에게는 상(賞)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삼았다.

 

 

〈의정궁주 義貞 宮主 墓〉

 

홀로 지내는 태상왕 (태종)을 위해 후궁을 들일 것을 신하들이 상소하였으나 태종은 몸이 늙었음을 들어 거절하였는데, 주변 신하들이 간택을 하였으나 어떤 칙접도 받지 못하고 가례도 올려보지 못하고 태종이 승하하시니 다만 궁주란 명목으로 평생을 처녀의 몸으로 외롭게 사신 분이시다. 

 

 

의정궁주조씨묘문인석(義貞宮主趙氏墓文人石) 

 

 

의정궁주 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는 조선초기의 묘로 고려의 묘제를 이어 받은 長方形으로 호석을 두르고 봉분한 묘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의정궁주는 상호군 조뢰의 딸로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나 가례를 올리기 전에 太宗이 돌아가시어 가례도 치르지 못한 채 妃嬪의 칙접도 받지 못하고 궁인이란 명칭으로 평생을 산 비운의 여인입니다. 연산군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궁주의 묘가 위치한 이곳 위에 후대의 연산군묘를 조성한 예입니다.

 

 

 

〈연산군사위 구문경 묘 燕山君 壻 具文景 墓〉

 

 

맨 위에 연산군 묘, 그 아래 의정궁주 묘, 그 아래 연산군 사위 구문경 묘(具文景墓), 딸 휘순공주(徽順公主) 등 슬픈 생을 살다 간 분들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王 연산군 묘역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