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경기 옛길 평해길 제 1 · 2 코스, 망우왕숙·미음나루길

鄕香 2021. 4. 4. 22:11

조선시대에는 6개의 큰 길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평해길은 서울 한양에서 경기도 동부를 거쳐 강원도 강릉을 지나 동해안 해안선을 타고 평해까지 잇는 지름길을 평해로 또는 관동대로라고 불렀습니다. 이 길은 현재의 구리와 남양주 그리고 양평을 경유하며 관동대로라는 별칭으로도 알 수 있듯이 관동지방인 강원도와 한양을 이어주던 길입니다. 

평해로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가던 길이었고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강릉에서 한양으로 오던 길이며, 강원감사를 비롯하여 원주 감영의 관리와 강원도 각 군 현으로 부임한 관리들이 원주 감영을 거쳐 한양을 오가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통해 영동·영서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다녔고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상거래를 하던 보부상과 지역 생산품을 실은 우마차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던 길이었습니다. 이렇듯 평해로는 역사와 문화와 민족의 희노애락이 스며있는 길이겠습니다. 평해로는 강과 산과 들판이 빗어낸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음미할 수 있는 길입니다. 〈경기옛길 가이드북에서 〉

 

경기도는 구리시, 남양주시, 양평군, (재)경기도문화재단과 함께 평해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 고증하고 그 원형을 바탕으로 하여 평해길을 조성하였습니다. 다만 옛길의 멸실, 각종 도로에 의한 노선단절, 도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구간 등을 대처할 대처로를 개척하여 관동대로를 따르는 역사문화 도보탐방로평해길 125km를 새롭게 개통하였습니다. (가이드북에서)

 

 

평해길 시발점 딸기원은 서울시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서 구리시 방향 고개마루턱에 있습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서울 방향으로 100여m 가면 고개마루에서 좌측 망우산 망우리공원으로 오르는 도로로 들어서 350m정도 오르면 망우공원입구에 이릅니다. 입구 앞 데크에 제1길 인증함과 안내판이 있습니다.  

 

 

 

평해길의 출발점 안내문입니다. 종주하실 분은 읽고 숙지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운 그리 늙었다 할 수 없을 해방둥이가 정년 후 15년을 이리 포스팅을 하다보니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과 마우스에 손에 얹고 2시간만 있으면 다리는 저리고 손가락이 전류가 통하는지 찌릿찌릿 하고 붓는데도 이리 흔적을 모아 남기고 있습니다. 글귀는 생각대로 타자해서 그대로 올렸습니다. 사진 분량이 많다보니 끼적인 글귀를 일일이 재검할 여력도 느긋함도 없고 분량에 질려서 그냥 올리다보니 오타나 글귀가 어설픈 것이 많습니다. 보시더라도 혜량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평해길 제 1코스 (망우왕숙길)는 이곳 망우리고개에서 시작하여 망우산 중턱에서 구리시청으로 하산하여 구리시청 - 구리전통시장 - 구리역 - 왕숙천 세월교까지 8.8km 거리입니다. 저는 1코스 거리가 짧게 느껴져 제2코스(미음나루길)이어서 

망우리 고개 마루턱 길가에서 경기옛길 평해 망우왕숙길은 시작됩니다. 

 

 

목련꽃 순결함을 활짝 피워내고 노랑개나리꽃 화사한 봄날 3월21일 일요일에 경기예길 6대로에 첫걸음을 내디뎌습니다.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선을 넘어 좌측 망우산 언덕으로 오릅니다.  

 

 

망우리고갯마루입니다. 우측도로는 청량리 방향 국도, 좌측은 망우리공원 오름길,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망우산공원 입구"

도로 끝에 두 갈래 길에서 좌측(구리시 둘레길)으로 들어서야합니다. 우측 길은 서울 중랑구 둘레길입니다.

 

 

평해길 제1길(망우왕숙길) 인증함과 안내판.

 

 

좌측 평해길로 들어서기 전 잠시 망우산 우측(서쪽)서울 중랑둘레길을 들어서서 본 모습.

 

 

유명인사들의 묘가 많은 망우산의 박인환 선생의 "목마와 숙녀"의 한 싯귀.

 

 

화가 이중섭의 묘소 안내 푯말, 여기서 다시 공원 입구 전 갈림길로 원위치.

 

 

여기서 좌측길로 갑니다. 우측길은 잠깐 들여다본 이중섭 묘로 가는 중랑구 둘레길입니다.

앞 갈림길 중앙 공간에는 망우리공원에 잠든 독립운동가 및 유명인사들의 사진과 소개글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좌측 언덕길로 300여m 오르면 좌측에 구리시청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나옵니다.

 

 

봄의 상징적 의미라고도 할 수 있을 개나리 노랑꽃 만발하는 때에 경기옛길 6대 도로를 평해길을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개나리꽃 화사하고 한그루 소나무 옆에 평해길 제1길 망우왕숙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구리시청으로 내려가는 오솔길 입구가 그 옆에 있습니다.

 

 

구리시청으로 가는 이 오솔길 입구가 시발점인 딸기원으로부터 1.5km가 되는 곳임을 이정표가 알려줍니다.

 

 

망우공원길 좌측 안내표시판 뒤쪽 구리시청으로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오솔길가에 개나리꽃 화사하게 핀 멋진 곳곳에 옛 분들이 영면하고 있는 곳을 지나갑니다.

 

 

망우산자락아래 아늑한 뒷산 길은 구리시청 옆으로 이어집니다.

 

 

2십만 구리시민의 행정을 꾸리는 살림집입니다.

 

 

구리시 앞 샘물이 솟아나는 자연호수 이문안호수입니다.

 

 

호수 옆 주유소 옆길을 따라 내려가면 구리시 실내체육관 우측 삼거리에서 촤측 언덕길에서 체육관 죽대를 끼고 체육관 정문 앞을 지나면 사거리가 나옵니다.

 

 

 

구리시 → 구리전통시장. 이정표푯말

 

 

사거리에서 대략 200m 직진 우측으로 전통시장 입구입니다.

  

 

 구리전통시장 정경.

 

 

구리전통시장 내 곱창집들이 줄지어 있는 곱장전골 골목길은 소문났지요.

 

 

구리시에서 남양주 덕소로 이어지는 국도변 롯데백화점 안쪽에 구리역이 보입니다.

 

 

구리역 옆 구리역 광장의 정경.

 

 

구리역 광장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입니다. 이 안내판으로 인해 경기옛길을 알았고 그리고 오늘 경기옛길 전 구간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구리역광장을 뒷길로 왕숙천을 향해 약 250m 정도 갑니다. 

 

 

왕숙천에서 한강 쪽으로 갑니다.

 

 

왕숙천이 한강에 유입되는 入水머리 전 세월교까지 가면 제1길 망우왕숙길의 종착점입니다. 다리건너부터 제2길 미음나루길이 시작됩니다.

  

 

왕숙천을 경계로 동쪽은 남양주시, 서쪽은 구리시입니다. 경기 옛길에서 앞에 보이는 세월橋까지가 제1길(망우고갯길)이고 세월교를 건너면 제2길(미음나루길)의 시작점입니다. 왕숙천이 한강에 유입되는 두물머리입니다.

 

 

제1길 종착지 안내푯말

 

 

세월교 서측(구리시)제1길 망우왕숙길 종점. 세월교 건너 동편(남양주시) 제2길 미음나루길

 

 

 《제2길 미음나루길》 

다리(橋脚) 아래 왕숙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는 합수머리

 

수석동 한정식 마을

 

 

옛 한강의 3대 나루로 이름난 '미음나루'가 있던 자리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 400m 정도 가면 고갯마루 좌측에 조말생 묘 안내 푯말이 있고 좌측 야산 길(수석리토성)을 50m정도 오르면 백제시대에 축성된 수석리토성과 인접한 곳에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의 묘가 있습니다. 

고개 넘어 600m 지점 산등성이(수석리토성)에 조선 전기 太宗 · 世宗 때 병조판서를 지낸 문신 조말생 묘지가 있읍니다.

 

 

남양주시덕소한강공원으로 넘어가는 자전거도로 고갯마루에 수석리토성과 조말생묘지로 들어서는 갈림길입니다. 좌측 산길로 들어섭니다.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 묘

 

 

<문강공 조말생 신도비>

신도비문에 의하면 1410년 기주관으로서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전농시부정장령, 예문관직제학,판성공감사,승정원동부대언,지신사 등을 역임하였고, 태종18년(1418)이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정대부가 되었으며 형조판서에 올라 태종을 측근에서 보좌하였습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해적이 변방을 침범하는 일이 빈번하자 세종임금께 진언하여 장군 이종무로 하여금 해적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징벌케 하였습니다. 세종15년(1433) 여진족이 침범하자 함길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으로 이를 막아 싸웠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순찰사로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축성을 감독했고, 1439년 궤장(机杖)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剛)으로 글씨가 뛰어났으며 임금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직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본래 묘소는 금곡동 묘적산 끝자락에 있었는데, 1900년 9월 그곳이 고종황제의 능으로 공표되자 이곳 (남양주 수석동산2-1)으로 이장 한 것입니다.

 

 

조말생 (趙末生,1370~1447)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文臣)입니다. 자(字)는 근초(謹初)·평중(平仲), 아호(雅號)는 사곡(社谷)·화산(華山). 이름(瑋)은 말생(末生)이며, 본관은 양주(楊州)입니다.  고려 말 판원사(判院事) 趙岺의 증손으로 趙誼 (書雲觀正)의 아들로 生員에 든 후 1401년 태종1년에 중광시를 장원하고 정언·감찰·헌납, 이조정랑 등을 지냈고, 140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종7년(1407년)에 文科重試를 2等에 入第한 후 장령·예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대언 등이 되었습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던 인물입니다. 그는 태종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35년간 두 왕을 모시며 나랏일을 돌보았습니다. 특히 태종의 파벌이었던 조말생은 세종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의 사이를 조율하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실하게 지켜낸 현명하고도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으나, 뇌물수수로 재산을 축적했다가 그로인해 귀양을 가게 되는 모습에서는 조말생이 어질고 현명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교수형에 해당하는 그 죄 값을 요구하는 많은 신하들이 주청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다만 귀양을 가게끔 한 세종임금의 결정은 조말생이 나라와 조정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결국 조말생은 세종에 의해 다시 관직으로 불려나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승진하면서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점차 나이가 들고 몸이 허약해서 세종임금께 몇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세종은 조말생 만한 인물도 드물다는 이유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세종임금도 조말생의 정치적인 견해와 영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말생 묘지 아래 길도 없는 외진 곳에 세워진 석실서원터표지석, 석실서원은 효종 5년(1654)에 김상용, 김상헌 형제를 배양한 석실사가 그 시초로 현종4년(1663)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김상헌의 후손들이 서원 교육을 맡아 북벌론의 재야 중심이 되었으나 철종 대에 들어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 등 안동 김씨들이 줄줄이 배향되어 안동 김씨의 私廟로 전락했고 결국 고종5년(1868)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 되어 지금의 표석만 남아있다.  

 

 

다시 국토종주자전거도로 및 보행자길로 이어진 한강미음나루길

 

 

석실마을 입구 안내판

 

 

덕소와 한강공원

 

 

덕소역

 

 

한강 건너 우뚝 솟아 있는 하남의 검단산 

    

 

팔당대교 밑을 통과합니다. 

  

 

팔당역 광장은 평해 제 2길 미음나루길 끝점이자 제3길 마재옛길 정약용길의 시발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로써 오늘 제1코스(망우왕숙길) 8.8km와 제2코스(미음나루길)12km. 합 20.8km 종주를 마칩니다. 

  

 

《제3길 마재옛길》

 

 

《제1구리왕숙길 · 제2 미음나루길》 끝 . 

2021년 3월21일 일요일 -鄕香-